등산

4. 5 대피소 - 보국문, 종일 가랑비

PAROM 2025. 4. 6. 08:43

춥다. 산길을 걷는 내내 비를 맞아서 그런가 보다. 집에서부터 비옷을 입었다가 더워서 역사관 앞에서 벗었는데 가랑비에 옷이 젖어 한기가 들었다.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를 주초에 봤다. 봄비라 가랑비로 잠깐씩 내리다 그칠 것으로 생각하고 산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가지 않으면 다음주엔 친구들 모임이 있어서 여럿이 모여 설렁설렁 걷고 말 것이기에 어지간 하면 가려고 했다. 더구나 지난주엔 주능선에서 눈폭풍을 만나 중간에 탈출했으니 더더욱 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집에 있으니 잔소리가 많다. 그것도 피해야 한다. 
 
아주 오랫만에 아내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와 사과 두 쪽, 핸더슨자켓을 맨티스 배낭에 넣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두워서 다른 때 보다 늦게 일어난데다 내일 막내 처남 49재에 갔다가 아들 집에 간다며 음식을 준비하느라 늦었다.  비가 내리니 등산화는 헌 동계용으로 신었다. 집을 나오며 보니 뜨거운 녹차가 빠졌지만 지난주처럼 아무것도 먹지 않을 수 있으니 그냥 역으로 향했다. 8시 2분 차에 거의 맞춰 닿았다. 차에 승객들이 적다. 비가 와서 그런가? 추운 듯하여 구파발역에 내리자마자 핸더슨자켓을 꺼내 입었다. 
 
8772번에 두 명이 타고 갔다. 빈 버스라 승객을 기다릴만도 한데 절대 그러지들을 않는다. 전세를 낸 것 같아 미안하다. 구파발역에서 먼저 떠난 704번이 뒤에 왔는데 그 버스에서 승객들이 몇 명 내리니 길이 길 다워졌다. 비를 피하려 편 것이 작은 3단우산이라 머리와 배낭 위만 겨우 막는 듯하다. 무겁더라도 2단 우산이 낫겠다. 감마자켓을 입었으니 배낭만 가려져도 되겠단 생각이었다. 계곡 앞에 서서 보니 구름이 많이 끼었고 노랗고 푸르고 붉은 기운이 계곡을 감돌고 있다. 왜 아직 흰색은 보이지 않는지 궁금하다. 
 
지난주에 살짝 비쳤던 꽃들이 활짝 피었다. 개나리, 진달래, 자두, 버들강아지, 생강나무꽃이다. 계곡은 많이 말라 나 없을 때 비가 많이 와야 좋겠다. 지난주에 엎어졌던 자리를 보니 한눈 팔면 빠지게 생겼다. 그만하기 다행이었다. 조금씩 내리는 가랑비에 바지가 젖어왔다. 허리도 아프다고 아우성이다. 조금만 걷다가 내려갈까? 암튼 가는 데 까지는 가 보자. 계곡에 꽃이 확실히 많아졌다. 봄인데 아직 덜 온 기분이다.  
 
역사관 앞 광장에 아무도 없다. 이럴수도 있구나. 다리 앞 지붕 있는 의자로 가서 비옷을 벗어 넣었다. 그리고 배낭에 언제 넣었는지 모르는 핫팩을 찾아 비닐을 벗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땀이 날 터인데 비옷을 입고 있으면 땀냄새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비도 오는데 오늘은 어디로 갈까? 허리가 아우성을 멈추니 내려간다는 생각을 잊었다. 선봉사 위쪽으로는 꽃들이 띄엄띄엄 피었다. 지대가 높아져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 발이 축축하다. 아, 새 양말인데.... 겨울에만 신던 것이라 물이 새는 줄 몰랐다. 이제 이 신발과도 이별을 해야 하나보다. 이 캠프라인을 오랫동안 잘 신었는데 아쉽다. 
 
비가 추적거려서 확실히 길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짝 따라왔다가 없어진다. 새는 길도 없고 비 때문에 쉴 곳도 없는데 이상하다. 노적사 아래 정자 처마밑에서 이어폰을 꺼내 끼었다. 바로 '나는 반딧불'이 흐른다. 요즘 푹 빠진 노래다. 흥얼거리며 우산을 들고 빗길을 걸어 올랐다. 바지주머니 속의 핫빽이 너무 뜨거워 자켓주머니로 옮기곤 하며 걷는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보국문에서 대피소로 가기로 정했다. 그리고 대피소 삼거리를 지나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태고사 아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돌아내려가려다 올라온 것이 아까워 그냥 위를 향해 걸었다. 몸과 정신 모두 내 마음대로 되질 않게 되었다. 
 
땀에 거의 젖다시피 해서야 대피소에 올랐다. 여기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이런 날도 있구나. 금줄이 쳐진  대피소 지붕 아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로 대동문으로 향했다. 능선길에 바람이 불어 왔다. 어후 춥다. 안부에선 늘 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더 춥다. 공사 중인 동장대를 멀게 빙 돌아 가서야 사람을 만났다. 공사 중인 동장대를 두고 무슨 말들을 하는지 움직이지를 않고 있다. 그들을 지나쳐 제단으로 갔다. 삼각산이 보이지 않는다. 정말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오려나 보다. 구름에 묻힌 삼각산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었다. 
 
대동문에서 바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발이 그냥 직진을 한다. 아직 괜찮단다. 나는 이미 비에 곤죽이 되었는데. 그래 아직 시간이 많으니 가자. 예전엔 늦은 밤 까지 걸은 후에 뒤풀이도 했었다. 다시 그때로 가자! 아, 그래 이제 봄이 됐으니 사기막골에서 야영 한 번 해야겠다. 근데, 누구와? 또 혼자다. 아니다 앞에 술잔들이 무리지어 있다. 보국문으로 가는 짧은 능선길 옆에 칼바위가 있다. 근처의 주능선과 키재기를 하지만 오르기 재미있는 길이다. 오늘은 화가 잔뜩 나서 구름 속에 숨었다. 다음에나 얼굴을 봐야겠다. 
 
주능선 저 멀리 문수봉이 구름모자를 썼다벗었다 하고 있다. 직선거리로 1키로 정도 되겠지만 거의 십리는 되어 보인다. 구름이 감고 흐르는 전망대봉우리가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참 오랫만에 보는 멋진 풍경이다. 비에 젖어 춥기는 하지만 참 잘 왔다. 이제 등산화는 완전히 젖어 질척거리고 있다. 오랫동안 발을 지켜주던 고마운 놈인데 아쉽지만 이제 이별할 때가 되었다. 길에서 어쩌다 만나는 이들이 반갑다. 비가 오는데 이 꼭대기에서 걷다니 대단한 이들이다. 역시 보국문 위에는 아무도 없다. 전망대 쪽에서 내려오던 이는 칼바위 쪽으로 바삐 지나갔다.  
 
일주일 전 폭풍과 함께 쏟아져 내린 눈이 하나도 안 보였다. 발목이 빠질 정도로 쌓였었는데 다 녹아 사라졌다. 봄은 봄이구나. 역시 이길은 흔들리는 돌들과 미끄러운 흙 때문에 내려가기  쉽지 않다. 눈과 낙엽에 묻혔던 여길 지난주에 한번만 자빠지고 내려간 것이 다행이었다. 계곡으로 내려오니 바람도 잦아들었고 추위도 비도 덜하다. 살만하다. 벗었던 장갑을 끼려는데 젖어 잘 안되어 지체되는 순간 분홍 비옷을 두른 두 명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들을 따라잡으려 뛰다시피 걷는데 간격이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저들도 우산을 썼고 나보다 걷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대단하다. 정말 잘 걷는다. 아니 뛰기도 한다. 산악마라토너들 인가? 간격이 조금 줄었다 싶으면 어느새 다시 벌어지곤 했다. 그렇게 걷다가 산영루 옆 비탈에서 계단으로 돌아가는 사이에 겨우 앞지를 수 있었다. 그들은 앞에서  더 빨리 걷던 역시 붉은 색의 점퍼를 입은 덥수룩한 사내와 일행이었고 그를 따라 잡으려고 뛰다시피 걸었던 것으로 보였다. 정자에서 셋이 다 쉬는 것을 보고 하는 추측이다. 행복한 결말이고 난 이제 경쟁거리가 사라졌다. 그제서야 주머니에 든 핫팩에 손을 녹이고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산속에 핀 진달래가 보였다. 다음주에 올 때는 막걸리 한 병 담아와서 꽃잎 띄워 한 잔 해야겠다. 레인커버가 없어 배낭이 다 젖었지만 어쩔 수 없다. 우산으로 가려지지 않으니 빨리 내려가는 수 외에는 없다. 올라갈 때 쉬었던 자리로 다시 들어갔는데 의자가 젖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지 앉았다는 증거다.  물도 꺼내지 않고 사과와 샌드위치를 급하게 먹고 길로 다시 나서서 자연산책로로 내려왔다. 비는 아직도 흩날리고 있다. 오늘 동네에서 현기를 만나기로 했으니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식당들을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다. 이런 날은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에 한 잔하면 딱인데....  
 
정거장 의자에 앉았는데 차갑다. 앗!  엉덩이가 축축하다. 젖은 의자였다. 한참을 기다려 37번 버스를 탔다. 빈자리가 많다. 배낭을 옆자리에 놓았는데 물이 떨어졌다. 그걸 휴지로 닦아내며 구파발까지 왔고 차를 갈아타며 탄현역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속이 메슥해지며 어지럽고 배가 아파 걸을 수 없어졌다. 큰일 났다. 한참을 쭈그리고 있다가 배낭에서 알마겔 한 봉을 꺼내 먹고 있으니 조금 안정이 되는데 여전히 죽을 지경이다. 역 앞 버스정거장의 따뜻한 의자에 앉아 있으니 진정이 되었다. 다행이다. 천천히 걸어 집으로 와서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뜨거운 물에 샤워하니 세상이 좋다. 운동하고 오는 현기를 4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한 시간 쉬다가 나가자.

 

 

비는 내리지만 가자!

 

구름에 잠긴 산봉우리들. 이제 계곡이 봄색을 입고 있다.

 

수구정 앞이 진달래와 개나리 차지가 되었다.

 

수문터 앞. 오른쪽 흰 우비 아래에서 지난주에 엎어졌다.

 

이런 모습이 좋아 비속을 걸었다.

 

버들강아지도 활짝 피었다.

 

폭포 못미쳐에 생강나무꽃과 진달래가 섞여 피었다.

 

폭포에 물이 많이 줄었다.

 

역사관 앞 광장이 텅 비었다.

 

중성문 아래 계곡. 이 연녹색을 좋아한다.

 

중성문. 생강나무꽃이다.

 

산영루. 누군가가 따라오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대피소길로 무의식 중에 피했나 보다.

 

태고사를 지나서 보이는 노적봉의 동봉과 서봉. 한 때 저곳을 다 지나 다녔다. 지금은? 못한다.

 

봉성암과 대피소 갈림길

 

아니 웬 할아버지? 대피소 아래 광장의 지붕 아래에 못 들어가게 금줄을 둘렀다. 어서 지붕을 고쳐서 치워지길 바란다.

 

동장대로 가는 길. 참 좋은 길이다.

 

길가의 진달래가 꽃을 준비하고 있다.

 

대동문 위 봉우리의 제단. 성벽 너머로 삼각산이 희미하다.

 

대동문. 지붕 아래에 비를 피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칼바위 갈림길. 칼바위 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칼바위 맞은편에서

 

전망대가 있는 봉우리를 구름이 오른쪽으로 지나고 있다.

 

보국문

 

대남문과 보국문 갈림길. 이제 4.1키로 남았다.

 

내려오는 길에서도 역사관 앞이 텅~~~~. 아무리 비가 와도 이러기 쉽지 않은데....

 

 대서문 아래 감나무 밭에 꽃이 잔뜩 피었다.

 

다 내려오니 비가 가늘어지며 하늘이 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