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이젠 토요일이면 의례 산에 가는 것으로 되었다. 겨울이라 점심 먹거리도 둘 중 하나다. 도시락이던지, 빵이던지. 산악회와 함께 가면 도시락이고 혼자나 친구들과 가면 빵이다. 아침 일찍 아내가 며칠 전에 일하러 갔다가 가져온 빵과 찹쌀떡을 꺼내 놓고 물을 끓여 보온병에 넣어 두고 출근을 했다. 오랫만에 빨간 조끼를 입었더니 등이 따뜻하다. 빵과 떡을 종이봉지에 넣고 보온용 옷과 물을 챙긴 후 배낭을 여몄다. 일찍 서두른다고 한 것이 8시가 되어서야 집을 나서게 되었다. 11시에 불광역에서 모여 출발하는 산악회와 함께 할까 하다가 한동안 비봉능선을 짧게 걸었기에 제대로 땀을 흘리려고 혼자 가기로 하였다.
산성입구에서 보니 회사에서들 왔는지 단체등산객들이 꽤 보였다. 계곡으로 들어서니 누가 겨울 아니랄까봐 찬바람이 불어온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걷는데 이어폰이 무겁고 커서 그런지 자꾸만 빠진다. 추운데 다시 끼는 것도 귀찮아 짜증이 난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하나 장만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걸을 길은 행궁지부터 가는 길이다. 지난 12.28일에 왔을 때 내린 눈이 녹거나 얼은 상태로 중간중간 미끄러운 곳이 있다. 아이젠 없이 계속 오르려다가 정자에서 신었다. 흙이나 바위길이 나타나면 고양이 걸음을 했다. 스틱 아래 고무를 빼지 않고 딛고 가는 이에게 빼라고 훈수를 하고 청수동암문 쪽으로 빠졌다. 역시 이길은 사람들이 없다.행궁지를 지나서 금줄을 넘어 계곡으로 가는데 12.28일에 내가 내려온 발자국이 그대로 있다. 그동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중간중간 토끼와 고라니, 멧돼지 발자국이 내발자국을 가로지르거나 나란히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조금씩 내렸던 눈이 바람에 날려와 내 발자국을 살짝 덮어 놓았다.
발자국을 따라 딛는 것이 발이 빠지지 않아 힘이 덜 들지만 내려오면서 만든 발자국이라 올라가면서는 도저히 그대로 따라 갈 수가 없다. 쌓인 눈의 겉이 굳어져 있어 발이 빠지면 러셀을 하는데 힘이 많이 들었고 신발에 눈이 조금씩 들어와 양말을 적셨다. 그렇게 계곡과 능선을 원래 길을 만날 때까지 힘들게 올랐다. 그 사이 추위는 사라지고 등은 땀으로 젖어왔다. 남장대지능선에 오르니 역시 바람이, 어김없이 찬바람이 불어왔다. 양지바른 바위아래에서 쉴까하다가 그냥 걷는 김에 내쳐 걸었다. 사실 시간을 보니 다른 때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았다. 아마 계곡에서 러셀을 하느라 힘이 많이 들었고 그래서 시간도 많이 허비했던 모양이다.
문수봉에 닿으니 거의 다 온 기분이다. 대남문에 사람이 많지 않다. 단체객들은 대개 대남문에서 모여 왁자지껄 행사를 하는데 그들은 아직 못 올라왔나 보다. 올라올 때 훈수한 사람들이 있나 찾아보니 없다. 바로 성곽을 따라 대성문을 향해 올랐다. 여긴 바위계단이 끝나면서 조금 더 오르는 길이 참 힘들다. 아래에서 힘을 다 써서 그런가 보다. 보국문을 향해 가는 오름길에서 무릎에 손을 짚으며서 걸었다. 웬 힘이 그리 드는지. 평소보다 힘이 더 드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능선에 얼음과 눈이 그대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먼지가 폴폴 날려 바지가랑이를 하얗게 만들었다. 대동문에서 시단봉을 우회해 동장대로 갔다. 아이젠이 돌계단을 밟는 것을 피하고 오름길이 힘들어서 였는데 오히려 계단을 바로 오르는 것이 힘이 더 덜들었을 것이었다. 대피소 지붕 아래는 사람들로 꽉 차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억지로라도 끼어 앉을 수는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고, 해가 따스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 옆 돌맹이에 걸터앉아 배낭을 풀었다. 보온병에 담아간 커피가 뜨끈하고 향이 좋아 '이 맛에 여길 오는 거지' 란 느낌이 들었다.
4시간 안에 마칠 수 있을까란 생각에 조금 발걸음을 빨리 했지만 어림 없는 일. 미끄러운 길이 끝나는 곳에서 아이젠을 벗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이젠을 벗으면 바로 나타나는 미끄러운 빙판. 다행히도 넘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창갈이를 한 등산화를 처음 신고 간 날이었다. 확실히 미끄러운 것이 덜했다. 심지어 얼음위에서 까지도.
산을 다 내려와 쉼터에 들려 따끈한 어묵 한 그릇을 먹으며 TV를 보니 의정부 아파트에서 불이나 여럿이 죽고 다쳤단다. 언제나 안전사고가 나지 않으려는지. 이제 다음주부턴 산에 와서 막걸리를 마실 수 있다. 약을 목요일 까지만 먹으면 된다. 신난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야 된다. 꼭.....
술을 마시지 않으니 아내와 사이가 무척 좋아졌다. 말도 많아졌고, 잔소리도 없고, 확인전화도 하지 않고, 싸우지도 않고,.... 이대로 술만 더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09:10)
(10:19) 이 계단을 오르지 않고 오른쪽 금줄을 넘었다.
(10:32) 계곡에서 러셀하면서 능선으로 올라온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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