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12.26 보국문 - 대피소

PAROM 2020. 12. 27. 09:54

얼마 전에 태양계를 벗어나는 우주선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봤다. 그냥 밤하늘을 봤을 때 보이던 별에 더도 덜도 아니었다. 그 푸른 점 하나, 그 속에서도 보이지 조차 않는 작은 나라의 아주 작은 동네 속 조그만 집에 둥지를 틀고 있는 내가 얼마나 의미있는 존재일까 생각했었다.

25일에 아들이 제 식구들과 같이 집에 왔다. 나에겐 손주를 보는 것이 종교인들이 구원자를 보는 것 만큼 의미있고 신난다. 그런 녀석이 왔으니 허리 아픈줄도 모르고 무등도 태우고 같이 놀며 신이 났었다. 뗑깡을 부려도 그저 예쁘고, 아무리 집안을 어지럽혀도 그저 웃음만 나오게 하는 녀석이 왔었던 거다.

내가 산으로 가기 위해 보통 때처럼 집을 나설 수가 없었다. 산에 가는 것보다 손주를 보고 있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10시가 넘어서 자기들 집으로 가는 아들 차를 타고 대화역으로 갔다. 시외버스 요금이 오르고 처음 온 것 같다. 시간이 늦어 그런지 승객이 별로 없다. 구파발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탄 주말버스도 그랬다. 코로나 때문에 산에 오는 이들이 줄었나 보다.

기온은 영상이지만 계곡으로 들어가니 찬바람이 분다. 지난주에 산에 왔다가 간 다음날 하루종일 콧물이 흘렀던 기억에 땀이 날 때까지 겉옷을 벗지 않다가 서암사에 가서야 벗었다. 기온이 영상이니 맨손으로 걸어도 시렵지 않았다.

계곡폭포는 지난주보다 더 많이 얼어 있다. 그 얼음 속으로 맑은 물이 나 들으라는 듯 시원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다. 눈과 귀가 모두 맑아졌다.

이제 운동을 못한 지 4주가 되어 걷는데 힘이 많이 들 것이란 생각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아직은 괜찮다.
계곡입구에서 찍은 사진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11:42다. 평소보다 두 시간 반이나 늦게 온 거다. 내일 하루를 온전하게 편히 뭉개려고 온 것인데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풍경이 바뀌었다. 해가 높아져서 폭포와 산영루를 찍을 때 역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때처럼 많이 걷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쉼터를 못 갈테니.

가장 짧은 길을 걷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걸어보려고 걸음을 빨리했지만 마음만 빨랐다. 요즘 나를 지나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젠 안타깝지만 받아드려야 한다.

늦은 시간에 오르니 나이가 든 분들을 많이 지나치게 되었다. 그렇다. 불광역에서 11시에 만나 출발하는 산악회들 보다 늦게 산에 들은 거였구나. 잘 차려입은 떼가 그들이었구나.

보국문으로 올랐다. 여기서 대피소로 가면 10.4키로를 걷는다. 오늘은 그 만큼만 걸으면 된다. 한동안 걷지 않던 행궁지로 가는 갈림길 위의 백운동계곡길을 근래 들어 수시로 걷고 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봐야 소용없다. 힘이 떨어져서 그런 거다.

보국문으로 오르며 고민을 많이 했다. 한 구석에 숨어 있던 마음이 계획대로 대피소로 가는 것 보다 문수봉으로 가는 것이 경치도 좋고 운동도 더 되니 자꾸만 그렇게 하자고 꼬득였다. 그렇게 보국문에 올랐는데 대성문 쪽에서 내려오는 한 무리의 꽁무니에 붙어 대동문으로 향했다.
시단봉을 오르는 돌계단을 이제는 쉬었다 오른다. 혹시 뒤에 누가 오르나 뒤돌아 보면서. 사단봉에 오르니 제단에 누가 앉아 있다. 참 보기 나쁘다. 며칠 후에 제사음식을 올릴 곳인데 제 몸뚱아리를 젯상에 올리다니. 산에 오는 자들이 많다보니 개매너인 자들도 많아졌다.

대피소로 가는 중에 왼쪽 엄지발가락 아래 발바닥이 아파왔다. 딛을 때마다 아프다. 족저근막염? 이게 심해지면 걸을 수가 없는데 걱정거리가 생겼다. 걸을 때 왼발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큰일이다. 발가락을 오므려보고 아픈 곳을 피해 딛기도 해 보지만 닿으면 아프다. 이럴땐 다른 생각을 하며 조심해서 걷는 수 밖에 없다. 부드러운 흙길을 찾아서.

대피소에서 처음 배낭을 열어 뜨거운 물만 두 모금 마시고 가지고 간 빵과 귤, 삶은 계란은 건드리지도 않고 계곡으로 내려섰다. 쉼터에서 잠시 쉬다가 갈 요량으로 걸음을 재촉하며 내려오다가 노적사 앞에서 기다란 외국인 둘이 길을 묻는다. 하도 오랫만에 듣는 말이라 백운대란 소리만 들린다. 대남문이나 문수봉을 묻지 하필 가는 길이 복잡해 설명하기 힘든 백운대를 묻나. 쉬운 단어들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튼 설명을 해주고 고맙단(이들은 그냥 일상적인) 말을 듣고 헤어져 바로 생각나지 않았던 단어를 찾아 봤는데 너무 쉬운 말이다. 헤어지고 나서야 쉬운 단어들로 말이 술술 나왔다. 혼자 영어로 길을 알려주며 산길을 내려오느라 발바닥이 아픈 줄 몰랐다.

가끔씩 존재를 알리는 발바닥을 달래가며 계곡을 내려와 쉼터에 잠시 들렸다가 동네 가게에서 막걸리를 사고 집에 오니 5시가 넘었다. 이후는 샤워하고 막걸리 한 잔하는 늘 같은 패턴.
이 글을 쓰다 잠이 들었고 3시에 깨어 이어 쓰는 중. 발바닥이 아직 아프다.

아, 사흘 전에 새로 산 피엘라벤 베르그타겐 인슐레이션 자켓은 좀 더 추워야 입을 수 있겠다. 그 옷을 어서 입고 싶다. 걍 평일에 입을까?

 

그러고보니 어제의 등산이 올해의 마지막 등산이었구나. 아듀, 2020년의 산행들이여~~~

 

 

계곡폭포. 얼음 속으로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얼음이 더 두꺼워졌다.

역사관 앞. 사람이 이리 많았나?

중성문 아래 계곡. 누군가 던진 돌이 얼음 위에 있다.

산영루. 겨울에여기를 지날 때면 해가 정면에 있었는데 오늘은 늦어서 해가 서쪽으로 갔다.

산영루 앞 계곡. 곧 폭포를 얼음으로 채울 기세다.

보국문. 여기서 고민하다 왼쪽으로 갔다.

오늘 내가 여기를 지나갔음을 증명했다. 저 뒤에 문수봉이 아쉬워 하고 있다.

언제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으려나.

대동문의 금줄. 어서 금줄이 풀리기를 바란다.

시단봉 제단에 제물이 올라 있다.

동장대

대피소. 1시가 넘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아 물만 마시고 내려갔다.

대피소 앞 헬기장. 저 뒤 나뭇가지 사이로 문수봉이 보인다.

봉성암 갈림길. 얼음이 징검다리 돌을 밀어낼 기세다.

다 내려왔으니 잠시 쉬고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