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3.14 행궁지 - 대피소

PAROM 2021. 3. 15. 10:36

쉼터, 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한참되어 어색하지만 반갑다.

어젠 왕십리에서 3시에 결혼식이 있었어서 오늘 산에 왔다. 요즘같이 출산이 줄어드는 땐 결혼과 출산을 무조건 장려해야 할 일이다. 그게 효도고 애국이고 자신의 장래에 대한 저축이다.

오늘 산에 간다고 하니 아내가 반긴다. 집에서 혼자 푹 쉴 수 있어서 겠다. 좋아서 그랬는지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싸 놓았다. 물론 자기가 먹을 것이 내 것의 세 배다.

날이 푹해진 것이 절로 느껴져서 배낭을 작은 것으로 꺼내고 여벌 옷들도 뺐다. 물론 아이젠도. 그리고 김밥도시락과 천혜향 하나, 보온병에 녹차를 담고 비상물품들을 넣었는데도 배낭에 여유가 있다. 그 공간은 산에 들어가서 점퍼를 벗어 넣을 곳이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열차와 버스에 빈자리가 많다. 산성입구에서 내리니 앞차가 금방 지나갔는지 산으로 가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다들 젊다. 계절 때문인지 풋풋함과 싱그러움이 흩날린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다. 40년도 더 전이지만.

일기예보에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나쁨이라 해서 그런지 산입구에서 백운대가 안 보인다. 아니 원효봉도 안 보인다. 그래도 마스크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는 시원하다.

계곡을 따라 오르며 방향을 잡으려고 고민을 한다. 오랫만에 전에 걷던 길을 걸어 봐? 그러다 힘들면 중간에 탈출하지 뭐. 그래, 그러자. 그런데 어디부터 갈까? 처음에 힘들고 이후엔 쉬운 행궁지가 어때? 그게 좋겠다. 그러자.

주중에도 열심히 운동을 해야한다. 그래야 주말에 산에 와서 게거품을 물지 않는다. 지난주에 게으름을 부리지 않아 몸이 정상이다. 늘 배낭이 고맙다. 아픈 허리를 잡아 주는 고마운 배낭.

계곡폭포 위 철계단을 가로지르는 생강나무가 노랗다. 반갑다. 올 첫 꽃구경이다. 진달래는 이제 봉우리가 돋으려고 하는데 벌써 활짝 폈다. 집 앞 산수유도 폈을 것 같다.

두리번 거리며 산길을 걸었는데 지난주와 변한 것은 없다. 지난주는 진관사계곡이었고 땅이 질었는데 오늘은 다행히도 덜 질었다. 행궁지로 갈라지는 길을 지나쳐 계곡으로 내려섰다가 경리청상창지를 지나 행궁지를 오른쪽에 두고 능선으로 올랐다. 일년에 한두 번 정도 걷는 길인데 지금 시즌엔 거미줄이 없어 좋다. 그러다 길에 쌓인 솔방울에 끌려 한참을 쭈그려 앉았다가 일어서니 어지럽다. 어린 시절 솔방울을 주워 교실 난로를 데웠던 추억이 초등친구들 얼굴과 겹쳐 올랐다. 내겐 순수하고 예쁜 친구들.

미세먼지가 많다는데 숨이 차서 마스크를 벗고 산길을 올랐다. 집을 나올 때 아내가 마스크걸이를 줘서 했는데 무척 편하다. 마주치는 사람 없이 능선에 올랐다. 이제 남은 길에 오르는 곳은 무시해도 될 정도니 살았다(나중에 짧은 오름에도 기를 쓴 것은 무시. ㅋㅋㅋ). 능선에 올라 의상을 보니 뿌옇다. 그래도 의상능선이 발 아래 있으니 미세먼지니 뭐니 해도 좋다.

처음엔 문수봉에 올랐다 대성문 정도에서 탈출하려고 했었는데 걷다 보니 발이 자꾸 주능선을 따라 갔다. 날이 맑지 않았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고 내 나이에 먼지 걱정해서 얼마나 더 건강하겠나 싶어 오랫만에 대피소까지 완주했다. 그래서 도착한 대피소까지 딱 세 시간 걸렸다. 주저 앉아 배낭을 벗고 김밥과 차로 점심을 해결하며 동시에 휴식을 취한다.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다.

내려오는 길에 젊은 친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지만 자랑할 건 없다. 나는 길을 잘 알고 그네들은 초보니까.

점점 더 젊은이들에 대한 부러움이 많아 진다.
다시 젊어지고 싶다. 그러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ㅎㅎㅎ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젊은 시간을 보내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ㅋㅋㅋ

산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니 세상이 참 좋다. 모두 다.

옆자리에선 사랑이 제일 좋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가?

 

 

미세먼지 때문에 원효봉이 겨우 희미하게 보인다.

비가 언제 또 왔는지 폭포가 그럴듯하다.

생강나무꽃이 피었다. 이 계곡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

산영루도 동양화 속에 있는 듯하다.

경리청상창지를 지나 행궁지를 오른쪽에 두고 올랐다.

여기서 삼각산이 잘 보이는 곳인데 먼지가 삼켰다.

남장대지능선에 올라서니 의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창 발굴중인 나한봉에 볕이 들었다.

상원봉에서 찍었는데....

문수봉에서 보는 구기동계곡

카메라를 조작하지 않았는데 바지주머니 속에서 스스로 멋대로 설정을 변경해서 방향이 바뀌었다.

칼바위 앞으로 형제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동장대. 참 오랫만에 온 기분이다.

대피소도 오랫만에 왔다.

계곡엔 아직 얼음이 남았다.

진달래가 터질 듯 부풀었다.

먼지가 조금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