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손주가 집에 오는 날이다. 그새 많이 컷을 것이라 어서 보고 싶다. 산으로 가기 전에 손주를 맞기 위해 급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조금은 편하다.
등산장비를 두는 장소를 바꿨더니 배낭 꾸리기가 더디다. 아내가 만들어 놓은 샌드위치와 오이, 둥굴레차를 보온병에 넣는 것으로 오늘의 먹거리는 준비됐고, 바람막이 겸 비옷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지난주에 다녀와서 잘 두었는데.... 요즘 들어 기억력이 부쩍 떨어졌다. 한참 온 집안을 뒤져 피아노 위, 쌕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니 그제야 산에 다녀와 거기 던져 둔 기억이 난다.
집을 나서며 보니 이제 꽃들은 거의 다 떨어졌고 잎들이 나오기 시작해 녹색으로 변하는 중이다. 탄현역에 들어가니 내가 탈 열차가 파주역에 있다. 금방 떠난 것이다. 다른 때보다 십 분을 일찍 나왔는데 그만큼 더 기다리게 됐다. 구파발 버스정거장에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만원버스에서 다행스럽게 앉아 갈 수 있었다.
계곡입구에서 보니 수채화가 눈앞에 있다. 온 산이 모두 꽃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이름을 알고 있는 꽃이 몇 개 밖에 없지만 보는 것 만으로 눈이 즐겁다. 길 가 꽃들을 보며 걷느라 처음엔 힘든 줄 몰랐다. 그러나 아흐레 만에 산에 왔고, 이틀 전엔 과음으로 운동을 빼먹었고 어제도 막걸리를 마신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사관까지 오르는데 힘이 들어 데크 의자에 쉬면서 숨을 골랐고 겉옷도 벗었다. 아직은 아침 기온이 낮아 티차림이 되니 찬기운이 느껴졌다. 이럴 땐 걷는 것이 특효다. 역사관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이는 쉬지도 않고 바로 백운대 쪽으로 갔으니 이젠 천천히 꽃구경이나 하면서 걷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런데 집에 귀한 손님이 오기로 했으니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
어디로 걸을까 생각하다 진달래밭인 행궁지 뒤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났다. 그래 몇 주 동안 걷지 않았던 길이고 꽃이 만발했을 것이니 그리로 가자.
마스크 틈 사이로 나오는 숨에 썬그라스가 자꾸 뿌옇게 된다. 병원에서 시력이 좋으니 굳이 백내장 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불편하고 험한 길에선 잘 보이지 않아 위험하다. 산에만 오면 눈수술을 해야겠다고 생각만 한다.
역시 행궁지 뒤로 돌아 오르는 길은 꽃밭이었다. 길가의 나무들이 모두 진달래인데 활짝 피었고 이제 피려고 몸을 부풀리는 것들도 있다. 그런 진달래 꽃밭이 남장대지 능선까지 이어졌다. 꽃구경을 하며 오르긴 했지만 힘이 무척 많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 후 다시 걷기를 수시로 반복하며 겨우 올랐다. 게다가 왜 배까지 고파 오는지.
쉽게 탈출할 수 있게 미리 배낭을 비우기로 하고 양지바른 바위의 그늘을 찾아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먹거리를 풀어 놓고 먹는데 샌드위치 두께가 장난이 아니다. 식빵 두께가 2센치나 된다. 반 쯤 먹었는데 배가 부르다. 어거지로 우겨 넣다시피 하며 먹은 후 앉은 자리 아래의 우회하는 길로 문수봉으로 갔다.
내가 광화문에서 일하던 2000년 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아 대남문 문구멍이 보였는데 이젠 뿌옇다. 문수봉에 오를 때마다 언제나 하늘이 맑아질 지 걱정이 되지만 우리 혼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고 보니 이웃 두 나라를 잘못 두었다. 세상의 온갖 못된 짓을 다 했고, 하는 나라들 말이다.
문수봉에서 오늘 길의 정점은 찍었고 이제 내려가는 일이 남았다. 보국문이나 대동문에서 내려가기로 하고 성곽을 따라 걷는데 다리가 풀렸는지 휘청거리는 느낌이 난다. 능선전망대를 지났는데 아들이 자유로라고 전화를 했다. 그러면 바로 내려가야겠다.
보국문에서 백운동계곡으로 내려가다가 절터를 지나는데 길에 까만 지갑이 떨어져 있다. 안에는 신분증과 카드, 현금이 들었다. 그냥 가지고 가서 공원탐방지원쎈터에 맡기려다가 잃은 사람에게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에 지갑 속을 보니 명함이 있다. 전화를 걸었는데 안 받아 문자를 했다. 그리고 역사관 앞에서 전화를 보니 전화가 와 있었다. 두 번째 전화가 연결이 되어 통화를 했고 산입구에 맡기겠다고 했는데 누군지 궁금했다. 해서 숙이네 앞 벤치에 한참을 앉았다가 탐방지원쎈터에 지갑을 맡기고 가다가 뒤돌아보니 지갑 임자인 듯한 이가 창구에서 지갑을 돌려 받는 모습이 보여 되돌아가 인사를 하고 쉼터에 잠깐 들려 얘기하다가 집으로....
집으로 오는 차도 산에 올 때처럼 버스, 지하철, 열차 모두 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타야했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서 시달려야 했다. 덕분에 대곡역에서부터 허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내겐 힘든 걸 잊게 할 손주가 있었다. 아내가 녀석을 자전거에 태우고 탄현역 길건너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는 척하며 손을 흔드는 녀석이 얼마나 이쁘고 반가운지....
계곡으로 들어서니 산이 다 꽃세상이다
백운대로 가는 길과 문수봉가는 길의 갈림길에 있는 작은 공원에도 온갖 색의 꽃이 피었다
너는 이름이 뭐니?
너도 이름이 궁금하다. 곧 잊겠지만.......
행궁지 뒷길로 오르는 길에도 진달래와 생강나무꽃이 활짝 피었다. 건너편은 주능선이다.
남장대지능선으로 오르는 길 양쪽에 진달래가 활짝. 다음주는 거의 다 떨어질 듯하다.
삼각산이 정면으로 막힘 없이 보여서 늘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남장대지능선을 막 올라가면 이런 진달래꽃길이 계속 펽쳐진다.
이 정도면 날이 좋다고 해야 하나? 동네가 저 멀리 뿌옇게 보이긴 했다.
청수동암문 앞으로 보이는 구파발
구기동계곡. 이제 오늘 산길에서 제일 높은 곳에 왔으니 마음 내키는 곳에서 내려가면 된다.
문수봉에 왔으면 증명사진을 찍어야 ....
지난 겨울 무채색이던 대남문에 연두빛이 돈다
여기를 처음 지나칠 때엔 저 난간에 매달려 내려가고 오르고 했는데 이젠 바깥쪽으로 그냥 오르내린다.
전망대가 있는 곳 소나무 아래로 보이는 삼각산이 멋져서 늘 사진을 남기고 있다.
지나온 길이 한 눈에 보인다. 앞의 주능선, 가운데 문수봉, 오른쪽의 남장대지능선
남쪽전망대에서 보이는 서울.맨눈으로 남산이 보였는데 사진에선 희미하다. 앞의 형제봉, 뒤 오른쪽 백악, 제일 오른쪽은 인왕산
보국문. 오늘은 여기서 왼쪽으로 하산이다
백운동계곡 제일 하류에도 꽃이 어우러졌다.
다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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