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11.23 대성문 - 행궁지

PAROM 2024. 11. 24. 06:44

춥다. 산의 기온도 집안도 내 앞의 막걸리도 춥다. 손주들 봐주러 간 아내는 내일이나 오니 며칠 째 혼자라 더 춥다. 
 
쌀을 어제 밤에 씻어 앉혀 놨으니 일어나 불만 켜면 된다. 이젠 나이가 들어 너무 이른 시간에 깨는 게 당연하다고들 하는데도 난 늘 싫다.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은 것이 밖의 기온이 낮은 가 보다. 닷새 후에 3일간 가족여행을 가기로 했으니 다음주에는 산에 못 간다. 그러니 오늘은 꼭 산에 가야 한다. 편의점에서 가지고 온 햄버거와 제주도 친구가 보내준 감귤 2개, 물을 넣는 것으로 배낭꾸리기는 끝났다. 그런데 오늘 배낭을 잘못 골랐다. 맨티스가 아닌 큰 것으로 메어야 했다. 이제 겨울이니 두터운 옷을 쉽게 넣고 뺄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설겆이까지 했는데도 7시가 안 됐다. 7:15 차를 타기 위해 느긋하게 준비를 하고 천천히 나갔는데 역 앞에 가서 보니 전철이 야당에 접근 중이다. 에스켈레이터는 또 고장이다. 숨을 몰아 쉬며 플랫폼에 가니 차가 들어 오고 있다. 대곡역에서 환승하려 에스커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오금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구파발역에서 올라가 버스정거장을 보니 704번 버스가 와 있다. 또 죽어라 뛰어 간신히 탔다. 그렇게 가서 북한동에 내리니 공기가 차갑다. 털모자를 쓸 껄, 더 두꺼운 티를 입을 껄 하는 후회가 든다. 부지런히 걷는데도 땀이 날 기미가 없다. 계곡입구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탄현역에서 55분 만에 왔다. 신기록이다. 
 
이젠 계곡길이 황량해졌다. 잎이 다 떨어져 길에 뒹굴고 있다. 아니 발을 삼킬 기세다. 하늘이 뻥 뚫린 모습이 낯설다. 다음주에 못 온다 생각하니 11월 이 모습을 담아두고 싶다. 며칠 전에 블로그를 보다 12년 전의 글을 보았다. 그땐 서리가 내렸었고 훨씬 더 추웠었다. 그런데 오늘은 옷이 얇다. 예전 보다 산에 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모퉁이를 돌 때 마다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젊어졌다. 산이 젊어지니 좋다. 하긴 나도 태어나면서 부터  늘 보던 북한산을 십 대 초반 싱싱할 때에 처음 왔고 스무 살도 전에 계룡산을 넘었었다. 나도 산을 젊게 했었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걷기만 하지만 자랑할 만한 경력이다. 지난번에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했으면 더 좋았을 경력인데....   
 
지나치지 못하는 역사관 앞 데크에 올라 몸을 풀고 물 한 모금 마시고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는데 잘 안 들어간다. 오래 애 써서 겨우 넣고 이어폰을 끼고 다시 길로 들어 갔다. 이젠 겨울이니 무조건 30리터 이상의 큰 배낭을 지고 와야 한다. 새로 사서 처음 입은 티가 바람이 들어오고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는 바람에 땀을 내기 위해 기를 쓰고 오르느라 힘이 더 많이 들었다. 중성문을 지나는데 머리 가운데가 아프다. 불안하다. 이 징조가 큰 병인 것 같아  돌아 내려 가고 싶다. 곧 증상이 사라졌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집안 내력인 중풍 증상과는 다른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머리 통증의 불안감에 대피소 갈림길에서 내려가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조금 더 가고 싶다. 쉬운  길로 문수봉을 가기로 하고 계곡을 따라 걸었다. 행궁지 갈림길을 지나고 나니 인적이 없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스산하고. 내가 원래 이런 풍경을 즐겼나? 모르겠다. 지금 난 내려가서 따스한 물에 샤워한 후 매콤한 낚지볶음이나 복매운탕에 시원한 막걸리 한 잔하고 다리 뻗고 쉬는 것이 소원이다. 대동문 갈림길 까지 끈질기게 따라 오던 이가 안 보인다. 걷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지만 상관 없다. 앞뒤에 아무도 없으니. 
 
보국문 갈림길을 지나면서 부터 이어지는 지루한 너덜길에 낙엽이 덮여 있으니 걷기가 너무 어렵다. 계속 헛딛어 자칫 발목을 다칠 지경이다. 진작에 스틱을 펼 껄. 나는 늘 뒤늦은 후회를 한다. 나쁜 버릇이다.
이 지루한 거친 오름길에 한가지 희망이 있다. 바로 대성암이다. 대성암이 보이면 힘이 나고 이제 다 왔다는 희망도 생긴다. 오늘은 대문도 열려 있었다. 바로 대남문으로 가지 않고 대성문으로 틀었다.  이 길에서 십 년도 더 전에 빗속에서 잃은 카메라가 생각났다. 오늘은 오래전에 썼던 블로그가 계속 따라 다닌다. 
 
헐레벌떡 대성문에 올라 문 앞의 의자로 갔다. 카메라 거치대가 혼자 있다. 나 같은 이가 또 있구나. 숨을 고르고 스틱을 꺼내 폈다. 물 한 모금 후 능선을 따라 불규칙한  가파른 돌계단을 올랐다. 내려오는 이들이 많다. 참 부지런들도 하다.
이제 곧 눈이 내리고 길이 얼면 이길은 걷기 어려운 길이 될테지. 그땐 여기서 만나는 이들이 반가울 거야. 대남문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은 아이젠이나 줄이 없으면.... 
 
거의 두 시간에 걸려 문수봉에 오르니 산객들이 무척 많다.
추우니 하늘이 맑다. 하늘이 맑으니 추운가? 전엔 보이지 않던 풍경이다. 대남문에서도 광화문이 훤히 보였었다. 세종문화회관 옆의 로열빌딩 13층 창가 자리에서 의자를 돌리면 대남문 문구멍이 하얗게 보였었다. 그 기억이 살아났다. 내가 좋아하던 이들도.... 대남문을 두 번이나 같이 올랐던 인연도.

문수봉은 일단 오르고 볼 일이다. 어디서던 보이고 어디도 볼 수 있으니....
누군가의 사진을 찍어주려는데 갓 올라온 이가 그니의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비키지 않는다. 그니가 비켜 달라고 하니 외려 째려 보다가 나를 보고 옆으로 간다.  사람들이 많아지니 개매너도 넘쳐 난다. 
 
오늘 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왔으니 이제 내려 갈 일만 남았다. 청수동암문을 지나는데 성벽길로 가다가 소나무가 쓰러져 있는 바람에 거의 포복으로 넘어 갔다. 성벽길에서 보이는 비봉능선은 언제나 멋지다. 그 길을 걷고 싶지만 향로봉 아래로 길고 급하게 떨어지는 바윗길이 싫다. 그 길들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니 다 보잘 것 없다.
성랑지를 지나 의상능선이 보이는 상원봉에 섰다. 집 옆의 제니스빌딩이 오랫만에 제대로 보였다. 성냥개비 보다 작다. 눈꼽 만큼도 안 되는 세상에서 지지고 볶고 살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살아서 그런지 고양시는 구분이 된다. 그런데 문수봉에서 보이는 서울은 어렵다. 항상 찾지만  로얄빌딩을 못 찾겠다. 
 
남장대지능선을 내려와 행궁지로 오는 길. 지난번에 처음 올랐던 길로 내려왔다. 손을 쓰는 일이 반의 반으로 줄으니 앞으로 이 길로 다닐 것이다. 낙엽이 잔뜩 쌓인 행궁지 옆길을 지나 조금만 더 내려오면 편안한 길들이다. 오르는 사람들을 봐도 헛다리를 짚지 않을 정도다(그냥 하는 말이다. 그랬다가는 큰일 난다). 그렇게 내려와 역사관 앞에서 스틱을 접어 넣고 계곡으로 내려왔다. 오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역시나 였다. 이젠 가끔씩 만나던 친구들도 보이지 않는다. 슬퍼해야 하나? 
 
산을 내려와서 보니 4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에서 7시 조금 지나 나가서 1시 조금 넘어 들어왔다. 혼자지만 연신내나 불광동에서 한 잔하고 싶었는데, 왜 벗어나지 못 하는 지....

 

 

산길에서 처음 만나는 계단.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물이 말라 명색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폭포

 

역사관 앞. 아직 해가 들지 않았다. 눈으로 봤을 때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진으로 보니 몇 명이네.

 

나무가 잎을 떨구고 나니 느껴지는 분위기가.... 춥다.

 

대성암에만 볕이 드니 부처님이 계신가 보다.

 

대성문

 

문수봉

 

대남문에서 보는 서울. 시내가 보이면 광화문이 어디고 세종문화회관이 어딘 지 늘 찾지만....

 

비봉능선을 지나 한강과 계양산도 보였다. 자세히 봤으면 마니산도 보았을 듯하다.

 

구기동계곡. 내 PC 바탕화면과 같지만 오늘이 조금 더 맑다.

 

삼각산

 

보현봉. 입산금지구역인데 요즘 유투브에 동영상이 자주 오른다.

 

성곽길에서 보는 비봉능선이 조금 더 자세하다.

 

상원봉

 

상원봉에서 보는 삼각산

 

증명사진 한 장

 

의상능선 너머로 우리 동네까지 맑게 보였다.

 

청송대에서 보는 주능선 파노라마

 

내려가며 보는 중성문

 

이곳만 붉은 단풍이 매달려 있다.

 

역사관 앞. 이제 잠시 쉬며 스틱을 접어 넣고 가야지

 

다 내려왔는데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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