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십여 년 된 산친구들과 같이 산길을 걷고 알탕을 하기로 했었다. 땀이 잔뜩 난 옷, 그 옷을 입은 그대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드는 것을 우린 "알탕"이라 한다. 그런데 요새 비가, 아니 장마가 참 오래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내가 사는 동네에는 밤에만 쏟아 붓고 낮엔 뜸했으니 오늘도 예보엔 종일 비가 온다고 했지만 아닐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래서 만나도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비를 싫어하는 친구가 비가 온다고 하니 다음에 만나자며 금요일 저녁에 단체톡방에 올렸다. 그래서 모임은 깨졌다. 난 같이 즐기기 위한 짐을 잔뜩 꾸려 놓았었는데.... 배낭에서 짐을 빼고 다시 제 자리에 정리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밤에 자다 깰 때마다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는데 조용하다. 예보와 다르게 비가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기예보는 거의 종일 비가 온다고 하여 알탕 약속이 어그러졌으니 아침까지도 비가 오지 않으면 오늘도 혼자 산에 갈 일만 남았다. 아침을 어제 남은 찬밥과 국수가 있어 만두국을 끓여 아내와 같이 나눠 다 먹었는데 배가 심하게 부르다. 이 바람에 오늘 11시 까지 거의 죽는 줄 알았다. 산에 오를 때는 절대 배가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을 잊어서 빚어진 일이었다.
새 방수배낭을 새로 꾸리고 빗속을 어찌 걸을까 고민하다 집을 나서며 시간을 보니 7:34이다. 여름 치고는 많이 늦었다. 하늘은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무겁고 어둡다. 아쿠아슈즈를 신을까 고민했지만 산에선 등산화가 맞다. 그리고 매일 신었으니 이제 빨 때도 됐다. 이젠 열차에 타서 빈 자리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경로석에 앉는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다시 본다.
앉아서 가다가 보면 내 앞에 버티고 서서 누구도 접근을 불허하는 이들이 있다. 배낭을 메었으니 곧 내릴 것이란 것을 알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얄밉다. 더구나 건장한 젊은이인데.... 최대한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심할 땐 몇 정거장 더 가서 내린다. 소심한 복수다.
구파발역에서 제일 나중에 내렸다. 버스정거장에 가서 차가 늦게 오면 이말산을 넘어가서 둘레길을 따라 불광동장미공원으로 가거나 송추로 가려고 했는데 주말버스가 바로 왔다. 버스를 타고 산으로 가는데 은근히 걱정이 생긴다. 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어쩌지? '그땐, 송추나 불광 쪽으로 둘레길을 걸으면 되지' 명쾌하게 정리를 하니 마음이 편하다. 하늘은 잔뜩 찡그리고 있는데 내게 불만은 아닌 듯 싶다.
산길로 가며 백운대를 보니 구름에 감싸여 동쪽 전체가 허옇다. 계곡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요란한 물소리가 들린다. 온 세상이 푸름도, 물이 넘치게 흐르고 있음도, 이 장마에 온 세상의 미물들도 살기 위해 최선을 하고 있음도 느껴진다. 그렇게 계곡 속으로 들어갔다.
일주일 만에 찾은 계곡길은 많이 패여 있었다. 일주일 동안 중간중간 내렸던 비가 이런 것이다. 그랜드캐년 계곡도 빗물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이정도는 약과 아닌가?
비가 온다는 예보에 길에 사람이 안 보인다. 어쩌다 보이는 이들은 나보다 늙수레 아니 연세가 들어 보인다. 마주치는 이들은 거의가 젊어 보인다. 그런데 거의 남자다. 웬지 이 시간 산속엔 인구 비례를 따르지 않는 것 같다.
계곡길을 오르기가 너무 힘들다. 허리는 끊어질 듯 하고 배는 주체할 수 없이 불러 죽을 지경이다. 이 나이에 밥 욕심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그래도 죽어라 걸었다. 패인 길을 피해 가며, 허리를 달래 가며 오르다보니 역사관 앞이다. 오늘 같이 힘든 날은 무조건 쉬었다 가야 한다. 그런데 데크 위의 의자들이 다 물 범벅이다. 다리 아래에 있는 지붕이 있는 의자로 가서 배낭을 벗고 모기약을 꺼내 뿌리니 가려움의 공포에서 안심이 된다. 의자로 올 때 배낭벨트에 꿰어 허리에 둘렀던 모자가 벨트를 푸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떨어진 것을 줏어 다시 배낭에 매달고 선암사 앞 가파른 콘크리트길을 올랐다. 절 버스가 지나가는 바람에 잠시 길을 비켜주었다가 다시 올랐다.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 대피소로 가기로 했다. 비가 와서 길이 젖어 있으니 이쪽으로 내려오지 않기 위해서는 이리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마음은 이길로 되돌아 내려오고 싶다. 아직 배가 너무 불러 다 귀찮다. 물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온 세상의 소리를 다 덮었다.
비가 오지 않는데 옷이 다 젖었다. 땀 때문이다. 잎이 많은 나무 밑을 지나면 갑자기 후드득 하며 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오래전 신불산 나무 아래 데크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의 상황과 같이 구름이 나무를 지나며 물방울을 만들어 놓았고 이것이 바람에 떨어지는 것이다. 구름이 많으면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 대피소로 가는 길이 힘들지만 견디고 죽어라 올랐다. 그런데 가쁜 숨소리에 은근히 걱정이 된다. 봉성암 갈림길 계곡에서 손수건을 적시고 세수를 한 것이 참 시원했다. 이후로는 계곡으로 내려오기 전까진 물을 만날 수 없으니.
돌집 대피소까지 올라 엉덩이 붙일 곳을 찾았지만 밖은 다 젖었다. 대피소 안의 나무의자에 배낭을 내리고 산에 들어와 물을 처음 마셨다. 이제 좀 배부른 것이 가라앉았다. 이제 제발 밥 욕심을 내지 말자. 아니 욕심을 낸 것이 아니라 먹다보니 그리된 것이었으니 적당히 먹고 멈춰야 한다. 이제 능선에 올랐으니 바로 내려갈까 했는데 발은 저절로 동장대로 향한다. 안부를 지나는데 구름이 성안으로 몰려드는 것이 보인다. 성벽길을 덮은 나뭇가지와 풀에 맺힌 구름조각들이 내몸에 옮겨 앉는다. 이젠 땀이 아니라 구름에 웃옷이 다 젖었다.
이틀전 목요일에 한 레이저 치료가 어젠 효과가 있어 잘 보였는데 오늘은 아니다. 다시 뿌옇고 흐리게 보였다. 바로 병원으로 가고 싶지만 월요일에 예약이 됐으니 견디며 증상을 기억해야 한다.
구름속에 잠긴 동장대를 지나 대동문을 향하다 나무뿌리를 밟는 바람에 미끄러져 깜짝 놀랐다. 젖은 나무는 밟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넘어지지 않았음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인적이 없는 붐볐던 길을 걸었다. 한 번 미끄러지니 젖은 긴 돌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저어해 흙길로 돌아 대동문으로 갔다. 공사자재가 지저분하게 쌓인 대동문을 힐끔 보고 바로 계곡으로 내려섰다. 이 길도 빗물에 파여 울퉁불퉁했다. 스틱이 있으면 편했을텐데, 다음부터는 늘 가지고 다녀야지.
잔뜩 패인 길이다. 어렵게 발디딜 곳을 찾아 계곡길로 내려서니 이제 좀 안심이 된다. 그런데 하늘이 점점 맑아지고 있다. 이러다 해가 비칠 듯할 정도다. 그냥 친구들과 같이 왔어도 됐을 것 같았다.
계곡으로 내려서서 처음 만나는 징검다리가 물에 잠겼다. 스틱이 있으면 건너기 수월할텐데 없으니 어쩌랴. 얕아 보이는 곳을 딛고 건너는 수밖에. 등산화가 디디어 반쯤 젖었다. 이어서 만나는 두 번째 징검다리도 뒷쪽이 파이고 쓸려 내려가 역시 잠겼다. 건너뛰다가 미끄러지거나 헛디디면 급류에 최소 부상이니 그냥 빠지는 것이 낫다. 그냥 대피소에서 내려갈 껄 하고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다 젖은 등산화가 질커덕 거린다. 또 만난 경리청상창지 앞의 세번째 징검다리는 아예 다 떠내려갔다.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길을 찾아 물을 건넜다. 행궁지에서 내려오는 계곡은 물이 많지 않아 건너며 손수건을 적시는 여유를 부렸다. 그리고 계속 내려오다가 드디어 이 계곡으로 내려와 처음 올라오는 사람을 만났다. 반갑고 신기했다. 등산객들로 붐볐던 길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니.
알탕을 자주하던 곳에 잠시 들러 상황이 어떤지 살피니 바닥에 쌓인 모래가 거의 그대로였다. 즉, 양은 많지만 거칠게 쏟아지는 큰 물은 내리지 않았단 얘기다. 하긴 오를 때 보니 계곡바닥에 검은 물이끼가 남아 있어서 짐작은 했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그런지 내려올수록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역사관 앞 데크에 올라 의자 마른 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물 한모금을 마시고 잠시 멍 때리며 옆 의자에서 열심히 허기를 때우는 이들을 보다가 계곡길로 내려섰다. 계곡을 다 내려오니 목도 마르고 다리도 힘든다고 난리다. 그러면 잠시 쉬었다 가야지. 산아래 상가들은 다 텅~~ 이었다. 비 소식 때문이리라.
집에 와 등산화를 벗으니 발이 허옇게 잔뜩 불었다. 더운물에 샤워를 하고 막걸리상을 차려 마시다 졸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3,999자라 4,000자로 제한된 카스에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오늘 가지고 가려 했던 대만산 싱글몰트.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있으려나 모르겠다.
비가 오지 않으니 쏟아지기 전에 얼른 갔다 와야겠다. 새로 구한 피엘라벤의 30리터 짜리 방수배낭을 멨다.
북한동 뒤로 산이 완전히 구름에 묻혔다.
자 이제 시작하자!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가 아우성을 쳤다.
원효봉이 가려졌다. 계곡에 물이 많다.
계곡 바닥에 물이끼가 완전히 씼겨 내리지 않을 것을 보니 큰물이 지진 않아 보였다.
계곡폭포 바위 위로도 물이 넘쳤다. 오랫만에 보는 웅장한 느낌?
역사관 앞에 아무도 없을 때가 다 있다니....
중성문 아래 계곡에도 물이 넘쳤다.
중성문 옆의 시구문. 작년에 알탕했던 자리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갔다.
아래 사진의 가운데 조금 위의 물이 보이는 곳이 작년에 놀던 곳인데 물에 완전히 잠겼다.
중성문을 지나 노적사로 가는 길의 오른쪽 산에 만들어진 작은 폭포들. 이곳에 물이 있을 때는 여기서 세수를 하고 수건을 적셨다.
산영루
산영루 옆의 와폭도 물이 넘쳤다.
대피소 가는 길. 이 앞 개울에서 시원하게 세수를 했다.
드디어 대피소 마당에 올랐다.
구름에 대피소가 묻혔다.
이건 비가 아닌 땀에 젖은 것이다.
동장대로 가는 길. 구름이 빠르게 지나는지 나무에서 물이 쉼 없이 떨어졌다.
동장대에서. 능선에 오르니 바람에 체온이 떨어져 모자를 써야 했다.
대동문 앞이 지저분하다.
첫번째 징검다리를 건넜다. 여기서 등산화가 반쯤 젖었다.
두번째 징검다리도 건넜다. 바로 앞쪽이 무너져 내려 발을 담궈야 했다.
경리청상창지 앞의 세번 째 징검다리는 흔적이 없다. 이 큰 길로 내려온 후 아직 만난 이가 없다.
노적사 아래 정자 옆의 계곡.누가 계곡을 건너고 있다.
역사관 앞. 이젠 날이 조금 개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조금 있었다.
다 내려왔다. 이제 원효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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