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11.19 행궁지 - 대피소

PAROM 2022. 11. 20. 11:00

집에 돌어와 더운 물에 샤워하고 막걸리 한 병 마신 후에 오늘 산행기 쓰려고 침대에 기대어 핸펀을 켜니 3년 전 오늘 발리 여행 때 적은 이야기가 떴다. 그걸 보다가 늦었다. 가장 최근에 갔던 여행이라 삼삼하고 또 떠나고 싶어졌다.

어제 아파트 입주자회의 끝나고 남자들 넷이 모여 소맥을 한 것이 알콜 농도가 높았었는지 새벽에 잠이 깼는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런 적은 광화문 시절에나 있었는데 뭐지? 몸이 나빠졌나 걱정이 된다. 이불을 벗어나기 싫어 뭉기적 거리다 보니 6시가 되었고 아내가 산에 안 가냐고 묻는다. 어쩔수 없이 일어나 세수하고 밥상 앞에 앉았다.
요즘은 배낭 꾸리기가 쉽고 간단하다. 아내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 하나와 단감 한 개, 그리고 뜨거운 녹차 한 병이면 준비 끝이다. 등산복을 입기 전에 일기예보를 보니 비 소식은 없고 구름만 조금 끼고 기온은 10도에서 오르내린단다. 걷기 좋은 날이다.

요즘 유투브의 계곡이나 바닷가 집 구경이 흥미 있어 출발 시간이 조금 남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참 안 됐다는 듯 본다. 우 쒸~~ 그냥 재민데....
기온이 좋으니 간단하게 입고 블루투스와 지갑만 더 챙겼다. 마스크도 챙겼다. 하마면 나갔다가 돌아올 뻔 했다.
지지난 밤의 비에 집앞 나무들이 환해졌다. 청소하시는 분에게는 이제 고난의 계절이 시작된 거다. 낙엽 치우기가 끝나면 눈이 내릴테니....

집안에서 뭉기적 거렸으니 탄현역으로 바삐 걸어가야 했다. 그런데 이 이른 시간에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이들이 있다. 역으로 올라가니 야당역에 접근 중이란다. 이렇게 도착할 때 기분이 좋다. 운정, 아니 야당 북쪽으로 많은 이들이 이사를 온 표시로 이 시간 말고도 탄현역에서 열차를 타서 빈자리에 앉은 기억이 1년도 넘었다. 열차 배차간격을 3호선 처럼 했으면 좋겠다.

이젠 구파발역 계단 오르기가 버겁게 느껴진다. 이럴 때면 부정하고 싶은 나이가 생각난다. 주말버스에서 내려 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들꽃' 유리창을 보니 '상중' 이라 쉰다고 적혀 있다. 내게도 점점 다가오는 아니 가까이 온 일이라 이 단어가 생경하지 않다.

계곡으로 들어가니 산이 훤해졌다. 며칠 전에 내린 비에 잎이 거의 떨어진 탓이다. 지난주엔 겨우 흐르던 물이 큰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하고 있다. 맑은 물과 깨끗해진 산을 보며 땀을 내고 있어 그런지 어제 마신 알콜기운이 몸을 떠나는 듯하다. 산길에 낮게 비치는 볕 때문인지 등이 더워진다.
역사관 앞 의자로 올라가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이어폰과 썬그라스를 꺼내 끼고 스틱도 폈다. 그 사이에 질러온 이들이 지나갔다. 내가 기를 쓰고 빨리 걸어봐야 별로 차이가 나질 않는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지만 천천히 여유롭게 걷는 것이 잘 되질 않는다. 왜 산에서 늘 이러는지? 빨리 내려가 쉬려고? 땀을 더 흘리려고? 아마 막걸리 생각 때문일지도....

지난주에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산길을 반 만 걸었으니 오늘은 남은 길을 걷거나 반대로 걷기로 했는데 시간이 많이 있다. 그리고 스틱을 역사관 부터 쓴 덕분에 다리에 힘도 여유롭다. 이 정도면 몇 년 전의 몸 상태로 볼 수 있다 싶어 길게 걷자고 마음을 먹었다.
선봉암 아래 가파른 비탈 끝에 작은 붉은 차림이 눈에 띄었다. 목표를 잡았으니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스틱도 폈으니 곧 따라 잡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간격이 좁혀지는 듯하기만 하면 이내 다시 멀어지길 되풀이 했다. 결국은 내가 용학사 바윗길로 들어가며 완패로 끝나고 다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제 이런 일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기에 그러려니 해야 한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목표물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길이 텅 비었다. 호젓한 산길을 이어폰에서 나는 노래와 같이 걸어 올랐다. 오랫만에 듣는 소리가 정겹다. 행궁지에서 그동안 가지 않았던 뒷길로 올랐다. 급경사에 놓인 나무계단이 언제부터 인지 무너져 내려 위험해진 것이 있었다. 내가 만든 8곳의 급한 오름을 지나 바윗길과 마주했다. 나무뿌리에 의지해 바위를 올라 돌아서니 삼각산이 웃고 있다. 이제 남장대지능선으로 가는 급경사의 미끄러운 길이 남았다. 이길만 오르면 남은 길은 거의 내리막이니 눈이 깔린 날을 빼고는 이렇게 걷는 것이 훨씬 편하다.

청수동암문 갈림길 이후 처음 능선 바로 아래 바윗길에서 등산객들을 만났다. 그만큼 이길은 한적한 길이니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멧돼지의 흔적도 많다. 남장대지능선에 오르면 편안한 길들이 반긴다. 이길 또한 대피소에서 동장대로 가는 길 처럼 좋아하는 길이다. 의상능선 너머로 내가 사는 동네가 구름에 살짝 가려 있다. 상원봉에서 성곽길로 내려가려다 바윗길로 해서 문수봉으로 향했다.

문수봉에 오르면 산길을 다 오른 것이고 집에 갈 일만 남은 셈이다. 일찍 편 스틱 덕분에 시간과 힘이 남았으니 대피소까지 성곽을 따라 걷기로 했다.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길들로도 걷고 싶지만 참 잘 안된다. 대남문과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을 지나 동장대에 닿으니 정오가 거진 되었다. 여기에 앉으려다 단체가 뒷편을 점령하고 있어 바로 대피소로 향했다. 여기에 화장실이 없어져 참 아쉽다. 오늘은 대동문부터 가고 싶어졌는데 없으니 갈 곳이 없다. 더구나 잎이 다 떨어져 멀리까지 휜히 보이니....

대피소를 그냥 지나쳐 길을 내려오다가 길 위에 있는 비탈진 바위로 올라가 배낭을 벗었다.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따스해진 녹차를 마시며 점심을 배불리 먹고 길을 내려와 쉴 곳을 찿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다. 결국 들꽃 까지 와서 닫힌 문앞 의자에 배낭을 벗고 앉아 옷을 추스리고 카톡을 보니 부고가 떴다. 상중인 집 앞에서 다른 부고를 받을 수도 있구나.

집에 오니 아내는 퇴근 전이다. 막걸리 한 잔하고 앉았는데 눈을 뜨니 한 밤이다. 또 자자.

계곡폭포에 물이 불었다. 비 덕분에 산도 한결 깨끗해 졌다.

중성문 아래 계곡. 잎이 다 떨어져 산속이 훤하다.

잎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중성문이 나무들 사이로 보이고 있다. 저 앞의 붉은 옷을 결국 따라가지 못했다.

산영루 아래 와폭에도 물이 불었다.

행궁지 뒤의 나무계단. 중간 큰 돌에 걸린 나무계단이 빠져 흔들려서 딛고 오르다 깜짝 놀랐다.

능선 아래 바윗길을 올라 돌아서면 이 광경이 펼쳐진다. 질리지 않는, 계속 보고 싶은 풍경이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주능선과 그 너머 수락과 불암이 보인다.

남장대지능선에도 잎이 다 졌는데 가지에 이 잎 하나만 남아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지막 잎새?

나무들 사이로 나월봉이 보였다. 예전엔 저 봉우리 중간의 바윗길을 가로질러 다니곤 했는데 이젠 눈 때문에 의상으로 가질 못한다.

우리 동네가 보이길래 얼른 한 장.

상원봉에서 보이는 의상능선과 원효봉, 염초봉, 그리고 삼각산

청수동암문 앞으로 구파발이 보인다.

비봉능선. 저길을 걸은지도 꽤 되었다.

구기동. 여기서 가장 빨리 내려가는 길이지만 돌길이라 피하는 곳이다.

증명사진. 멋 때문이 아니라 백내장 때문에 쓴 안경이다.

P.C.의 바탕화면을 이 사진으로 바꿀까?

대남문. 겨울 같은 모습이다.

보국문으로 가는 길 중간의 바윗길. 처음 이곳을 내려올 때에 무서워 벌벌 떨며 난간에 의지했는데 이젠 난간 바깥으로 날아 다닌다. 아, 그땐 눈이 쌓여 미끄러웠었다.

앞사진의 바윗길을 올라 돌아서면 이렇게 지나온 길이 펼쳐진다.

남쪽전망대에 서면 이렇게 보인다. 형제봉, 백악, 인왕

남쪽전망대에서 본 문수봉과 남장대지능선

보국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성곽 너머로 칼바위도 보인다. 저 뒤의 산은 수락과 불암이다.

대동문 위 봉우리 제단과 성곽 너머로 보이는 동장대와 노적봉 그리고 삼각산

동장대 앞에서 보이는 문수봉

대피소. 화장실이 없어서 오늘은 그냥 통과다.

태고사로 내려가는 중에 이 비탈 바위에서 배낭을 벗고 점심을 해결했다. 저 아래 두 명은 길가에 앉았다.

이 국립공원 이정표에는 대남문까지 2키로로 표시되어 있고 더 뒤 노란 표지판에는

일산소방서에서 만든 이 표지판에는 대남문까지 1.6키로다. 이게 최근에 만든 것이니 1.6키로가 맞나? 근데 그 사이 길이 내 키처럼 줄었나?

잎이 지니 계곡 건너 큰 바위얼굴도 모습을 제대로 드러냈다.

역사관 앞. 한 시 조금 지났는데 벌써 해가 졌다.

다 왔다. 하늘이 산위에서 본 것보다 더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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