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12.3 대피소 - 보국문

PAROM 2022. 12. 4. 19:03

며칠 춥더니만 올 겨울 들어 처음 눈이 산길을 하얗게 덮었다. 다른 해 보다 늦은 것 같다. 산에 드니 하얀 길에 마음이 비워진 기분이다. 
 
지난주를 거르고 오늘도 못 올 참이었는데 오게 되어 참 좋다. 산길을 걷는 내내 싱글벙글, 힘들어도 흐흐흐 했는데 내일을 생각하니 간밤에 극적으로 월드컵 16강에 나간 것은 잊혀지고  긴장되고 가슴이 답답하다.
지난주는 처조카 결혼식 때문에 운정신도시의 공원들을 이어 걷는 것으로 대체했고 나흘 전에 불법으로 형질변경했다고 해서 포크레인을 불러 나름대로 밭을 깎아냈는데 한 것 같지 않다는 담당자의 말에 내일 다시 작업을 하기로 했다.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과 진정인, 공무원의 이해가 서로 상충하니 땅주인인 나만 죽을 지경이다. 아무튼 내일은 경계선을 많이 깎아내야 할 판이다. 참 편치 않다. 
 
오늘 하기로 했던 밭일이 포크레인 기사의 사정으로 내일 하기로 해서 잘 됐다 싶었다. 해서 오늘 해야 했던 집안 일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했다. 아들이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문상하러 집에 온다고 했단다. 아들 친구 아버지면 나일 수도 있다. 정신없이 손주들 손 닿는 곳에 있는 물건들을 치우니 아이들이 왔고 대여섯 시간을 정신없게 하고 갔다. 전날의 전 직장 친구들 모임에서 마신 막걸리 후유증에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연말이라 모임이 많은데 큰일났다. 
 
새벽에 깨어 축구 기사 보느라 이불 속에 있었더니 아내가 깨우지 않아 늦었다며 난리다. 그 와중에도 산에서 캅라면 먹으라고 물을 끓여 보온병에 넣어 놓았다. 나도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니 30분 늦었다. 눈이 온 걸 알았으니 아이젠을 챙기고 옷을 하나 더 입고 겨울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탄현역에서 8시 7분 열차를 탔는데 빈자리가 하나 있다. 이런 일도 있구나! 
 
버스에서 내려 계곡으로 들어가니 길이 하얗다. 얼마만에 보니 눈길인가? 반갑다. 길가 계곡에서 물소리가 크게 반기고 있다. 내가 산에 오지 않은 동안에 비가 많이 왔었나 보다. 계곡길을 걷는 내내 물소리를 벗 삼아 걸으니 이어폰을 낄 수가 없다. 아니 물소리가 더 좋다. 
 
걷는 동안 기온이 올랐는지 내가 힘이 들었는지 등판이 젖은 느낌이다. 역사관 앞 데크에 올라 핸더슨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색안경을 꺼내 모자에 올리고 이어폰을 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걷자.
선봉사 비탈 시작점에 봉고가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가까이 가서보니 눈길에 내려오다 미끄러졌는지 운전석 쪽 범퍼는 깨졌고 엔진룸이 보였다. 바퀴는 터졌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길.... 내려오며 보니 차는  조금 아래 주차장에 치워져 있었다. 
 
길에 눈이 쌓였으니 조심해 걸어야 한다. 네 발로 가는 차도 미끄러져 깨졌으니 두 발인 나는 더 조심해야 한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짧게 걷기로 한다. 그런데 다음주는 산친구들과 백악에 가니 여기에 또 오지 못하는데 어쩌나?
정자를 지나 옛길로 가는 바위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저걸 밟고 가야 하는데.... 바위를 지나쳐 조금 위의 비탈길을 지나 옛길로 갔다. 내 성격에 왜 밟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이 길 위의 밟지 않은 눈길을 다 밟아 놓은 성격이니.... 
 
스틱 덕분에 수많은 미끄러움에서도 자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대피소를 오를 때는 몸을 크게 지탱해 주었으니 이제 스틱은 내 산행의 필수품이다. 봉성암 갈림길에서 주황색 옷의 서양 여성이 엄청 큰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가 쌩끗 웃는다. 난 "Hi~~~ " 하고 내 길로.... 오름길에 눈이 잔뜩 쌓였으니 힘이 더 든다. 대피소에 올라 켑자켓을 벗어 보니 등판이 많이 젖었다. 이제 위에는 티셔츠만 입었다. 
 
한참을 쉬었는데도 따라 올라오던 이들이 보이지 않아 대동문을 향해 걷는다. 마주치는 이들이 평소의 반에반도 안 된다. 눈이 와서 그런가? 심심하다. 맞다. 눈이 내린 길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걸어야 운치와 재미가 있는데.... 하지만 내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대동문 위 제단 뒤에서 삼각산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고 내려가는 돌계단길이 왜 그리 힘들었는지. 눈 쌓인 좁은 돌계단과 자빠짐에 대한 공포. 이 나이에도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많으니 오래 살아야 할까 보다. ㅎ~~ 
 
주능선길은 바람이 불어 추웠다. 길 양쪽이 터진 곳에서는 어김없이 찬 바람이 불어 티만 입은 몸 속으로 냉기를 쏟아 부었다. 주능선길이 좋은 것이 바람을 피하는 곳을 수시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 추운 날에 티만 입고도 긴 길을 걸을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칼바위를 지나며 건너편을 보니 구름이 끼어 형제봉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기온이 올랐는지 볕이 드는 곳엔 눈이 녹아 질척거린다. 보국문으로 내려가기 전에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고 바윗길을 조심조심 엉덩이를 뒤로 잔뜩 빼고 내려와 너덜길로 변한 길을 스틱에 몸을 맡기고 느릿느릿 내려왔다. 그리고 큰 길을 만나니 어찌나 반가웠는지.... 눈이 얼음이 되어가는 길을 서둘러 내려왔다.
그리고 오랫만에 들린 쉼터. 편해서 좋다. 이제 다 쉬었으니 집으로 가자.

 

산으로 들어가는 길. 의상봉 아래 능선 위로 구름이 낮게 깔렸다.

수문터에서 보이는 원효봉

계곡에 눈이 내리면 참 멋지다.

계곡 폭포엔 물이 펑펑

역사관 앞

눈이 내린 산길은 아무리 많이 조심해도 모자란다.

쓰러진 소나무를 치우니 너무 썰렁하다. 쓰러진 소나무가 멀쩡한 소나무도 꺾었나 보다.

산영루가 보이는 풍경

산영루

산영루 옆 계곡폭포에도 눈이 쌓였다.

대피소 아래에서 본 의상능선

대피소

편안하고 호젓한 길에 눈까지 내렸으니 이 아니 좋으냐?

동장대 앞 전망대

동장대

대동문 위 제단 뒤에서 보이는 삼각산

칼바위 앞으로 늘 보이던 형제봉이 구름에 가렸다.

이 아래가 보국문이니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경리청상창지 앞 길

행궁지 갈림길에서 조금 내려오면 계곡 옆으로 겨울에 얼음으로 덮이는 바윗길이 나온다.

백운대 갈림길 삼거리에서 보이는 원효봉

역사관 앞 데크로 오르는 계단이 망가진 지 몇 주 만에 뜯어서 세워 놓았다.

다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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