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엔 배탈이 나서 집 근처 산에 다녀 왔고 다음 주부터는 상가 총회와 집안 행사들이 줄줄이 있어서 산친구들의 동행을 마다 했으니 오늘은 꼭 산에 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져 버렸을 정향나무꽃을 확인하고 싶었다. 등산을 마치고 난 후엔 충무로에서 13시에 만나기로 한 친구들도 보러 가야 했다.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것을 아는 아내가 점심거리를 안 가져가도 되지 않느냐고 묻기에 그건 아니라고 해서 샌드위치와 과일, 얼음병을 받아 배낭에 넣고 7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섰다. 1시까지 인현시장에 가려면 서둘러야 해서 일찍 출발을 한 것이다. 어제 일기예보엔 오늘 비가 조금 온다고 했었는데 잊고 그냥 나와 역으로 가며 하늘을 보니 먹구름 사이로 해가 숨바꼭질을 한다. 집에 다녀오기엔 많이 와서 조금 온다고 했으니 비가 오면 그냥 맞을 생각을 했다.
구파발역 버스 정거장으로 가니 줄이 길게 있어 제일 뒤에 가서 섰다. 지금 시간엔 주말버스와 34번이 다니지 않으니 704번 밖에 없다. 한참 후엔 온 버스는 만석이었고 기다리던 이들이 모두 탄 버스는 터질 지경이 되었다. 그냥 걸어서 이말산을 넘어 가까운 능선이나 넘을 껄 하는 후회가 된다. 버스에서 내려 산으로 들어가는 데 길이 사이키델릭한 조명을 비추는 듯 하다. 하늘을 보니 해가 먹구름 속을 들락날락하고 있다.
집에서부터 위엔 티셔츠 하나만 입었으니 배낭을 벗는 수고 없이 바로 계곡으로 들어 갔다. 짙은 녹색의 숲이 조용하다. 비가 온 지 오래되어 수량이 많이 줄었다. 물소리가 없는데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눈을 밝혀 주던 꽃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늘 산길 걷기 힘들겠단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갈까? 시간에 맞춰 가려면 대피소에서부터 주능선을 따라 걷는 것이 좋겠다. 마침 이렇게 걸은 지도 한참 된 듯하다. 8시 반도 안 된 이른 시간인데 벌써 내려오는 이들이 있다. 계곡폭포에 이르니 땀이 나고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도 앞서가는 이들을 지나 부지런히 걸었다.
역사관 앞 데크로 올라가 의자에 배낭을 벗으니 등이 다 젖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이어폰을 끼고 다시 길로 들어갔다. 배낭에 로프와 헬멧을 단 쌍쌍 둘을 지나쳤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암벽등반은 꿈도 못 꾼다. 저들이 부럽다. 그런데 부부일까? 그렇다면 더더욱 부럽다. 같은 취미를 갖고 서로를 믿고 줄 하나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것이. 만경대 근처에서 발생한 낙석 때문에 길 곳곳에 등산로 폐쇄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대동사 ~ 백운동암문 ~ 용암문 구간이 막혔는데 백운대 쪽으로 가는 이들이 많다. 원효봉으로 가는 이들인가 보다.
1시에 약속이 있으니 마음이 급하다. 그런데 발은 더 무겁다. 빨리 걸을 때는 55분이면 올랐던 대피소가 멀고 높다는 생각이 든다. 쉬고 있는 이들을 지나쳐 80분 만에 닿았다. 배낭을 벗고 목을 축인 후 바로 출발했다. 쉬는 것은 내려가기 바로 전에 하기로 하고. 능선길이 적막하고 어둡다. 어두워서 적막한가? 나뭇가지가 터널을 이룬 평화로운 길을 지나자 볕이 드는 길이 나오며 살이 따갑다. 벌써 여름이 되었다. 동장대를 두른 노란줄이 보기 싫다. 어서 보수공사를 하던가 해야지 이러다 다치는 이라도 생기면 어쩌려는 지.... 동장대 앞 전망대를 막은 나무들도 정리를 했으면 좋겠다. 동장대 앞 만이 아니라 모든 전망대 앞을.
동장대를 지나다 길가 산초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알게 된 산초와 제피의 구분법이 생각났다. 그래서 길가의 산초들을 일일이 만져보았더니 딱 한 그루만 가시가 어긋나지 않았다. 향과 맛도 산초 보다 강하고 오래가는 듯했다. 올해는 산초 열매로 장아찌를 만들 수 있을까? 오래전 태국여행 중에 얻은 것을 잘 먹었었는데. 보국문에 도착해서 시간을 보니 더 걸어도 여유가 있을 듯하여 성곽을 따라 가파른 돌계단을 올랐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길로 가려다 정향나무를 보기 위해서. 이길의 중간에 그 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다.
바윗길을 내려가기 전에 있는 정향나무를 보니 꽃대는 있는데 꽃이 없다. 이미 진 것이다.나뭇가지들을 헤쳐보니 속에 아직 지지 못한 꽃이 있어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다. 향이 남아 있다. 좋다. 이 향을 맡기 위해 일 년을 기다렸다. 여기오기 정말 잘했다. 오늘 약속 때문에 가지 못한 남장대지능선을 걸었으면 더 많은 꽃과 향을 만났을 것이다. 힘들어 하던 발이 가벼워졌다. 대성문에 도착하니 더 걷고 싶다. 그런데 대남문에서 내려가는 길이 싫다. 급하고 험한 바윗길이라 눈과 다리에 무리를 주면 안 된다.
대성문에서 내려가기로 했으니 쉬었다 가려다 따가운 햇살에 더 내려가다 쉬기로 했다. 여기까지 이정표 거리로 6.5키로니 평창동으로 내려가면 10키로를 걷는 거다. 내게는 이 길이 가장 쉽고 빠르게 가는 길이다. 일선사를 지나 내려가며 예전에 올빠들과 쉬었던 절벽 위로 가는 길을 찾았으나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형제봉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평창공원지킴터로 가는 길로 내려 섰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진다. 길이 알던 것보다 험해진 느낌이다. 큰 돌들이 가파른 길에 많다.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 데. 길을 가로지르는 물 옆 큰 바위에 걸터앉아 순식간에 먹거리를 비웠다. 그제야 아까 지나쳤던 이가 지나간다.
다시 배낭을 걸쳐 메고 걸어 내려가는데 뭔가가 머리를 쿡 지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뭇가지다. 낮게 깔린 가지를 자세히 보니 열매가 잔뜩 달려 있다. 개복숭아로 보였다. 아직 덜 자랐다. 이게 공원 밖에 있다면 손을 탔을 것 같다. 동령폭을 지나는데 공원 직원 둘이 올라간다. 내가 부러워하는 이들이다. 급여를 받으며 업무로 산을 다니는 이들. 만약 내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런 직장을 선택했을까? 지금은 아니지만 그땐 공무원들 급여가 너무 낮아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적게 다니는 길을 다 내려와 지킴터를 지나니 정오가 가까워졌다. 버스를 타는 곳까지 아직 1키로는 더 걸어야 한다. 가파른 길을 타박타박 내려오니 발바닥이 아프다. 자하문을 지나는 버스를 보내고 터널을 지나 도상 앞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려 인현시장 실비식당으로 가니 2분 전이었다.
친구들을 만나 많이 마셨다.
자, 가자! 산으로....
산으로 가는 길에서 먹구름 사이를 해가 숨바꼭질을 했다.
저 플래카드가 더 많아졌다. 보수공사를 어서 마쳐야 한다.
오늘은 먹구름이 하늘에 잔뜩 끼었다. 그래도 해가 나는 곳이 많다.
아직은 어두운 날이다.
계곡폭포가 거의 말랐다.
역사관 앞
중성문
산영루
대피소로 가는 길
땀을 한 말이나 쏟고 대피소에 닿았다.
광장 앞 나무들 사이로 문수봉이 보였다.
마음이 편해지는 동장대로 가는 숲길
이 전망대는 겨울 외에는 쓸모가 없어졌다.
동장대
산딸나무가 꽃을 피웠다.
제단 뒤의 성곽 너머로 삼각산이 보인다.
대동문
칼바위와 형제봉
보국문으로 내려서기 전에 보이는 문수봉
보국문. 공사가 언제 마무리 되려는 지....
북쪽전망대도 다 가려졌다.
멀리 보이는 문수봉과 남장대지능선
남쪽전망대의 전경
이곳에서 보이는 삼각산이 참 예쁘다.
정향나무꽃이 다 지고 이것 하나만 남았다. 그래도 얼마나 향기로웠는 지....
저 앞 봉우리도 다 걷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려갈 때 무릎이 나갈 수 있어서....
대성문. 여기서 내려갔다.
내려가다 숲이 트이며 칼바위와 남쪽전망바위가 드러났다.
평창공원지킴터로 내려왔다. 아직 1키로 정도는 더 걸어야 버스를 탈 수 있다.
내려오니 먹구름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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