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의 종아리 다침으로 요즘 유산소운동의 강도가 약해지고 빈도도 줄었다. 그 때문인지 기력이 차츰 회복되는 느낌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상쾌하다. 며칠 전에 많이 내린 눈이 산을 어떤 모습으로 바꿨을 지 궁금하다. 배낭부터 챙겼다. 아이젠과 스틱이 들었는지 확인하고 지난주에 가져가지 않아 불편했던 물도 넣었다. 기온이 6도까지 오른다니 장갑과 모자도 예비로 넣었다. 이제 뜨거운 차와 샌드위치만 더 넣으면 된다.
시간을 보니 늦은 것 같아 역까지 뛰다시피 가서 알림판을 봤는데 열차가 5정거장 앞에 있다. 이런, 시간을 잘못 봤다. 한참 만에 탄 열차는 늘 그렇듯 만석이다. 이제 탄현역에서 빈자리를 찾기는 어렵다. 3호선 대곡역에서 빈 경로석에 앉았다. 날이 많이 밝아져서 그런지 한겨울과 같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아졌다. 주말버스에서 내려 산으로 들어가는데 바람이 차갑다. 지하철에서 뜯은 핫팩을 꼭 쥐고 앞선 이를 부지런히 뒤쫓았다.
계곡입구로 들어서니 볕이 드는 자리의 눈은 다 녹았는데 그늘이 지던 곳은 얼음이 되어 있었다. 계단과 길에 쌓였던 눈은 밟혀 솟았던 것들이 얼어 톱날 같아 미끄럽지 않다. 길옆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춥다. 한겨울에도 계곡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는데 오늘은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털모자로 덮은 귀가 자꾸 드러나 고쳐 쓰게 만든다. 오늘 일기예보와 완전 딴판이다. 땀이 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계곡을 올랐다. 무리하고 싶지 않아 앞사람 뒤만 따라갔더니 신경 쓰이는지 길옆으로 비켜서며 지나가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나를 바짝 따라온다. 아, 이게 아닌데....
역사관 앞 데크에 올라 켑자켓을 벗어 배낭에 넣고 아이젠을 신고 이어폰을 끼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펼 수 있게 배낭 옆 주머니에 스틱을 끼웠다. 선암사 앞의 급경사길을 처음으로 데크길로 올랐다. 숨이 가빠지는 것이 역시 계단길이 더 힘들다. 위로 오를수록 눈이 깊다. 오랜만에 눈에 뒤덮인 모습을 보니 낯설지만 포근한 느낌이다. 눈이 푹신해 발바닥이 편하다. 몇 년 된 등산화라 아무리 고어텍스가 들었다고 해도 물이 들어올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지난주에 괜찮았으니 오늘은 문수봉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괜찮으면 다 나은 것이다. 다행이 아직은 다리와 고관절 모두 이상이 없다.
법용사 앞에 한 무더기 산객들이 쭈그리고 아이젠을 신고 있다. 의상능선으로 가는 이들인가 보다. 나도 십 년 전에는 저들 같았다. 이젠 혼자 다니니 걸릴 것이 없어 좋지만 가끔은 외롭다. 그래서 종종 저들이 부럽기도 하다. 중성문을 오르는 급경사에 눈이 많이 쌓여 오히려 푹신하다. 이길을 이리 편하고 쉽게 오르다니 산에 오래 다니고 볼 일이다. 역사관에서 쉴 때 지나친 이들과 다시 앞뒤 서기를 했다. 앞에 가다 갑자기 사라지더니 뒤에서 나타나 앞서 지나가니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 있겠다. 나는 길 위에 있는 옛길로 오르니 나는 그들을 봐도 그들은 나를 볼 수 없다.
산영루 비석거리 급경사길에 트럭 한 대가 가로로 걸려 있다. 중흥사 차가 눈길에 내려가다 미끄러졌나 보다. 다행이 차는 찌그러지지 않았지안 아무리 4륜구동이래도 이런 눈길 급경사를 내려가는 것은 무모했다. 그 차는 내가 내려올 때도 그대로였다. 그 바람에 등산객들은 모두 데크길로 오르내려야 했다.
대피소갈림길을 지나자 문수봉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 좁아졌다. 앞선 이들의 발자국을 벗어나면 발목이 넘게 빠졌다. 길을 벗어나 러셀을 하니 깊은 곳은 정강이 까지 빠졌다. 등산화 발목에 눈이 들어와 금방 젖어오니 다시 길로 돌아와야 했다. 스패츠 없이 눈속을 다니면 안 된다.
부드럽게 쌓인 눈 덕분에 힘드는 것을 모르고 대성암 까지 올랐다. 바로 문수봉으로 오르기 보다 한 달 전과 같은 길을 걷기로 하고 대성문으로 향했다. 다닌 사람이 적어 내 발자국을 내며 오르는 곳이 많아 힘이 더 든다. 몇 번을 무릎을 짚으며 쉬었다 오르니 대성문 앞에 사람들이 많다. 잠시 숨을 고르며 쉬다보니 정릉과 평창동 방향에서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대남문을 향해 옆길로 빠져 올랐다. 길이 푹신해서 좋다. 하지만 좁아서 마주치면 한 명은 길 밖으로 나가야 했다. 대남문에 닿으니 등산객들이 많다. 대남문 성벽 밖 나못가지에 상고대가 예쁘게 피어 사진을 찍느라 다들 분주하다. 나도 그 사이에 엉거주춤 끼어들어 사진을 찍고 문수봉으로 향했다. 문수봉 초입의 바위를 눈이 덮어 길의 흔적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잘못낸 길로 오르려니 죽을 맛이다. 내가 길을 만들자니 양말이 젖을 까봐 못 하겠다. 그래도 오르고 나니 양말목이 젖었다. 사진을 찍고 숨을 돌린 후 청수동암문으로 내려갔다. 남장대지능선으로 가려고 보니 길이 다져지지 않았고 우회로엔 한 명의 발자국만 있다. 오를 때 행궁지삼거리에서 본 발자국이 몇 없었으니 남장대지능선으로 가면 거의 러셀을 해야할 듯하여 발길을 돌려 대남문으로 향했다. 문수봉을 돌아가는 길 중간중간이 끊어져 러셀을 하느라 발목이 젖어왔다. 스패츠를 해야 하는데 집에 있으니....
대남문에서 대성암으로 바로 내려오는데 올라오는 이들을 많이 만나 길 밖으로 자주 빠져 고맙다는 인사를 들어야 했다. 대성암에서 부터는 올랐던 길인데 역시 마주치는 이들이 많아 길을 비켜주며 내려오는 바람에 등산화 표면의 가죽이 다 젖었고 새는 곳이 있는지 왼발 바닥 한쪽이 축축해졌음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에 문수봉에서 내려오는 길의 너덜들이 눈에 덮여 기분 좋게 내려왔는데 다시 그때와 같이 돌과 바위들이 눈에 가려지니 한 없이 즐겁고 편해졌다.
편하고 쉽게 내려왔는데도 역사관에 닿으니 정오가 지났다. 아직 다리에 이상이 없으니 아팟던 것은 다 나은 것이라 기분이 좋다. 데크 위 의자에 배낭을 풀어 스틱과 아이젠을 넣고 뜨거운 옥수수 차에 샌드위치 반쪽을 먹고 찻길로 하산하여 바로 집으로 오니 2시가 조금 넘었다. 7시간 만에 돌아왔다. 진흙이 튄 바지와 땀에 절은 티를 세탁기에 넣고 따스한 물에 샤워하고 찬물로 마무리. 바로 아침에 아내가 차려 둔 안주로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다리를 쭉 펴고 한갓지게 마시니 부러울 것이 없다.
산 입구 계곡엔 물이 넘쳤다.
폭포에도 물이 넘쳤다.
역사관 앞. 사람들이 많다.
이 앞의 두 명과 산 입구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대피소 삼거리에서 갈라졌다.
중성문. 길이 눈에 덮여 푹신했다.
중성문 위의 노적교 아래 길
용학사로 가는 예길. 나월봉이 보인다.
산영루로 오르는 급경사길 중간에 트럭이 가로걸려 있다.
산영루
내 생각에 이곳 금위영이건기비 앞이 산성 내에서 가장 너른 평지로 생각된다.
대성암이 눈에 덮여 졸고 있다.
대성문을 거의 러셀로 올라야 했다.
대성문
대남문
대남문 앞 성벽에 걸린 상고대
문수봉을 배경으로. 내 스틱이 눈에 꼽혀 있다.
문수봉에 오르니 이미 많은 이들이 있었다.
구기동게곡이 맑게 보였다.
오늘은 귀가 많이 시려서....
서울 시내를 배경으로
청수동암문 앞으로 구파발이 보였다.
대남문 지붕 아래에서 본 구기동
경리청상창지 앞길
아침엔 얼었던 길이 진흙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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