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5. 2 대피소 - 행궁지

PAROM 2026. 5. 3. 09:37

 

5월이 되었다. 곡우를 지났는데 비가 오지를 않는다. 이제 이틀 지나면 입하다. 이제부터 가을 늦게까지 물고 쏘고 하는 것들 때문에 걱정이다. 가려운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5월엔 모기가 많지 않았는데 이상기후 때문인지 지난주 백운대에서 떼로 몰려 다니는 것들을 보았고 어젠 대피소에서 쉬다가 모기가 덤비는 바람에 기겁을 해서 도망 나와야 했다. 지금 보니 어디서 물렸는지 팔목과 등이 가렵다. 지금 밖엔 밭을 풍요롭게 하는 반가운 비가 내리고 있다.  
 
일 하러 다니는 아내 덕에 혼자 남게 되어 집안 일이 온전히 내 일이 되었다. 이젠 놀러 다니며 지내야 되는데 손주들 등교 시키러 다니느라 이번 달도 8 ~ 9일을 안산에 가야 한다. 그 바람에 팔곡동 밭 한 귀퉁이를 얻어 모종 몇 가지를 사다 심었다. 하나도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아내 없이 산에 가려니 마음이 바쁘다. 4시 반에 일어나 이것저것 하다 밥솥에 누룽지가 있어서 끓여 먹고 배낭을 꾸려 집을 나와 걷는데 세상이 이상하게 보인다. 안경을 쓰지 않고 나왔다. 다시 집에 가기 귀찮아 그냥 썬그라스에 의존해 걷기로 했다. 역에 도착하니 야당에서 6:30 열차가 출발했다. 환승도 딱 맞았고 37번 버스도 금방 왔다. 오늘은 안경을 쓰지 않은 것을 빼고는 일이 잘 풀린다. 가볍게 걸어 산으로 들어갔다. 오늘이 가장 이른 시간에 산에 온 날인데 사람들이 많다. 해가 빨라져서 다른 사람들도 일찍 나왔나 보다. 
 
계곡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까치만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다. 보름 넘게 비가 오지 않아 계곡이 말랐다. 나무들은 완전히 녹색으로 감쌌다. 숲길은 이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주와 다르게 이번엔 두 명이 내 뒤를 쫓는다. 떨쳐내려고 걷다가 내가 지쳤다. 일흔이 넘어도 왜 이러나? 산이 높아질수록 다리가 무거워졌다. 지난주에 제대로 몸 관리를 하지 못한 탓이리라.  
 
역사관에 도착해 바람막이를 벗고 보니 등이 다 젖었다. 계곡 입구에서 벗었어야 했는데 귀찮아 한 탓이다. 발 앞이 흐릿하게 보이니 색안경을 꺼내 썼다. 한참을 쉬고 길로 들어갔다. 오늘은 발이 무겁게 느껴지니 짧게 걷고 집에 가자고 마음 먹었다. 발이 무겁다 생각하니 더 힘이 든다. 계속 이러면 대피소로 갔다가 보국문에서 내려오기로 했다. 중성문 아래 비탈길에 커다란 바위로 바닥을 깔았다. 비가 많이 올 때마다 돌들이 쓸려 내려가서 그런가 보다. 이제 길가엔 병꽃이 가장 흔하다. 애기똥풀과 산괴불주너미, 눈괴불주머니, 죽단화 그리고 이름 모르는 풀꽃들도 흔하다. 
 
중흥사 앞으로 가서 계곡을 건너 대피소로 향했다. 태고사를 지나 온 한 쌍이 앞에서 오르는데 간격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다리가 천근만근 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쉬는 틈에 지나치며 보니 외국인이다. 이젠 산에서 외국인이 흔히 보인다. 눈 인사를 하고 먼저 오르려니 더 힘들다. 등산도 경쟁자가 있어야 하나? 대피소까지만 가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란 생각에 매달려 올랐다. 
 
셔츠가 다 젖어서야 대피소에 도착했다. 배낭을 벗고 쉬고 있는데 깔따구가 덤벼드는 소리가 들린다. 놀라서 도망치듯 대동문을 향했다. 오늘은 해가 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썬그라스를 쓰고 걷는 내 모습이 우습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자빠져 다치는 것 보다 우스운 것이 낫다. 능선길은 전망이 멀리 까지 보이면 발이 가벼워지는데 오늘은 구름이 끼어 동양화 같은 풍경이 펼쳐져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그러고 보니 대피소 오를 때의 무거웠던 다리는 경쾌한 움직임으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행복이 시작됐다.
 
보국문에서 내려가려다 시간을 보니 9시 반이 조금 넘었다. 시간도 많고 기운도 남았으니 더 걷기로 하고 대성문으로 향했다. 참 오랫만에 걷는 길이다. 길이 대충 보이지만 늘 다녔던 길이고 돌계단과 바윗길이라 가파르고 험하긴 해도 힘만 있으면 충분히 갈만하다. 바윗길의 중간에 정향나무가 한 그루 있다. 지나며 보니 꽃잎이 나오기 시작해서 향을 맡았는데 전혀 향이 나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지나가며 맡아야겠다.  
 
대성문에 도착해 잠시 앉아 쉬다가 오늘이 남은 삶에서 가장 젊은 날이란 생각에 더 힘들기 전에 늘 다녔던 길을 가보자 생각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성벽길을 올랐다. 이제 다시 힘들기 시작이다. 무릎을 짚으며 대남문을 향해 돌계단을 올랐다. 해발 693미터 표지석을 지나 내려가는 바윗길이 갑자기 가파르고 폭이 좁게 느껴졌다. 한동안 오지 않았단 얘기다. 
 
대남문을 지나 문수봉으로 향했다. 이제 지쳐왔다. 꼬부랑 할머니 처럼 손은 무릎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그렇게 문수봉에 올랐다. 힘이 들어 바로 대남문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오늘 아니면 또 언제 이 길을 걷겠냐 싶어 바윗길을 내려가 청수동암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힘이 덜 드는 성곽길을 따라 상원봉에 오르고 남장대지능선을 걸었다. 능선 끝 쯤에 있는 정향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난 정향나무 꽃의 향을 좋아하는데 이삼 년 동안 맡은 기억이 없다. 올핸 맡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꽃이 피어 있을 때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이제 배가 고파졌다. 누룽지로 채운 배라 일찍 꺼졌다.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결국은 용학사 아래 계곡으로 정했다. 능선의 양지 바른 바위에서 하려던 생각이 반 시간이나 먼 곳으로 되었다. 행궁지를 돌아 내려와 계곡 길로 내려오니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다. 등산화는 돌들을 걷어차고 나무 뿌리에 걸리고 흙 먼지를 뒤집어 써서 엉망이 되었다.  
 
용학사 아래 계곡에  물이 말랐다. 처음 보는 광경이다. 그래도 그곳에서 배낭을 벗고 샌드위치와 토마토로 점심을 먹고 내려왔다. 오랫만에 옛 길을 걸었다는 감흥은 피곤함에 묻혔다. 어서 집에 들어가 따스한 물에 샤워를 하고 싶다. 오늘은 12.6키로 4시간 40분 동안의 산행이었다. 행궁지에서 대피소로 걷는 것이 오늘 걸은 것 보다는 쉽다는 생각에 언제 다시 오늘 걸은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시간이 나를 점점 먼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좋은데....

 
 
자, 가자! 산으로

 
계곡입구. 해가 구름 속에 들었다.

 
청둥오리 한 쌍이 수문자리 아래 웅덩이에 내려 앉았다.

 
계곡 폭포가 말랐다.

 
역사관 앞에 도착했다.

 
중성문 아래 비탈길을 큰 바위로 깔았다.

 
나월봉이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오늘 나월봉을 내려다 보며 걸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

 
산영루 옆의 비석들. 임금 행차 시 보라는 공덕비들인데.... 고혈을 빼 먹는 짓들을 한 것이다.

 
산괴불주머니가 길가에 지천으로 피었다.

 
대피소에 올랐다. 저 나무 기둥들 위에 지붕은 언제나 올리려나?

 
하늘이 보이던 길인데 녹음이 다 덮었다.

 
아직 진달래가 남았다.

 
오늘 산길에는 병꽃이 대세였다.

 
철쭉이다.

 
대동문 위의 제단에서 보이던 삼각산이 나뭇잎들에 많이 가려졌다.

 
대동문

 
칼바위와 형제봉. 산수화가 따로 없다.

 
보국문으로 내려가기 전인 이 때만 해도 저기 멀리 보이는 문수봉에 오를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국문. 여기에 도착하니 시간과 힘이 남았다. 그래서 성곽을 따라 더 걸었다.

 
남쪽전망대 봉우리에서 보는 산들. 여기서 보이는 능선과 봉우리를 모두 걸었다.

 
이 사진을 찍은 곳 뒤에 정향나무가 있다.

 
대성문이 가려졌다.

 
저 구멍 밖은 낭떠러지다. 해발 693미터 표지석은 조금 더 가서 있다.

 
대남문으로 내려가기 전에 보이는 문수봉

 
구기동계곡

 
구름이 낀 날에 안경이 없어서 썬그라스를 낄 수 밖에....

 
청수동암문 앞

 
상원봉으로 가는 성곽길에서 보이는 비봉능선

 
문수봉 뒤꼭지 모습이다. 저기서 바로 비봉능선에 닿으려면 사진 오른쪽 낭떠러지 뒤에 있는 쇠난간에 의지해 내려가야 한다.

 
상원봉의 성랑

 
상원봉에서

 
의상능선. 나월봉이 저 아래에 있다.

 
남장대지 앞 바위에서 보는 삼각산

 
행궁지로 내려가는 중 보이는 삼각산

 
앞 사진을 찍은 곳에서 고개를 살짝 돌리면 주능선 뒤의 칼바위가 보인다.

 
행궁지. 발굴과 복원공사는 어제 끝날까?

 
얘는 이름이 뭐지? 구글에서 '아그배나무' 란다.

 
역사관 앞에 다시 왔다.

 
다 내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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