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10.23 행궁지 - 대피소

PAROM 2021. 10. 24. 13:18

힘이 들어 가라앉는 느낌이다. 오랫만에 행궁지 부터 대피소 까지 오래(?)전에 자주 걷던 길을 걸었더니 세월 탓인지 예전 같지 않다. 스틱에 의지를 했으니 그나마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몸살 나겠다. 걷는 욕심을 버리지 못 하는 한 주말에, 사람이 산에 많을 때 산에 와야 하겠다. 
 
지난주에 아롬이를 주능선 전망대에서 만나 같이 내려와 들꽃에서 목도 축이지 못했는데 오늘은 여유롭게 앉았다. 이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한다. 
 
요즘은 할 일 없이 집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다. 새벽에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고 와서 주식시장 시작하는 것 보고 그 다음 일과 끝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 직장이라고 부둥키고 있는 아내를 끌어낼 수도 없고.... 코로나 핑계로 움추리고 있었지만 이젠 뭔가를 하긴 해야 한다. 내 버킷리스트 속의 일들을. 
 
어제 버거킹에서 쿠폰으로 사 온 작은 햄벅과 콜라를 넣고 아내가 담아 놓은 과일 그릇과 뜨거운 녹차를 담은 보온병을 배낭에 넣는 것으로 등산준비 끝이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런데 탄현역에 가니 안전점검인지 뭔지 때문에 열차들이 지연된단다. 이런.... 7분 늦게 온 열차에 승객이 많아 서서 대곡역까지 갔다. 구파발역에서 바로 온 버스 덕분에 계곡입구에 도착하니 8시 50분이다. 빨리 오긴 했다. 
 
집에서 나오며 한겨울용 티셔츠를 입었다. 추운 것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계곡으로 들어 가니 물소리가 난다. 지난주에는 비가 아주 조금 왔는데.... 역시 계곡폭포에 물이 많이 줄었고 계곡 바닥에 물이끼가 짙게 끼었다.  그러나 물은 한없이 맑다. 그런데 물소리가 춥다.
이번주에 운동을 거르지 않아 허리에 이상을 느끼지 않고 걸을 수 있었나 보다. 그런데 일주일 내내 운동하는 것은 힘들어 하루 쯤 제끼려고 한다. 땡땡이가 얼마나 신나는 지 나는 안다. ㅎ~~ 
 
오늘 걸을 길은 이미 이불 속에서 정해 두었다. 오늘은 열심히 걸으면 된다.
나름 빨리 걸었는데 시간이 당겨지지 않은 것 같고 땀만 더 났다. 역사관 앞에서 겉옷을 벗어 넣고 스틱을 폈다. 물도 안 마시고 앉지도 않았다. 편 스틱을 그냥 들고 가는데 까지 가보자 생각하고 걷자니 참 불편하다. 뒷짐을 지니 지나가는 분들에게 민폐다. 괜히 일찍 폈다. 
 
단풍이 밑으로 많이 내려왔지만 백운동계곡엔 옛길 외엔 단풍나무가 많지 않아 가을 정취를 느끼기 쉽지 않다. 얇은 장갑을 낀 손이 갑갑하다. 지난주 보다 기온이 높나 보다. 왼손의 장갑은 벗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장갑은 사진 찍기에 너무 불편하다. 말로 찍으라고 해도 되지만, 남이 돌아볼 것 같다. 
 
드디어 산객들이 거의 없는 행궁지길로 들었다. 그런데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길 옆 풀숲을 멧돼지가 다 뒤집어 놓았다. 아래쪽은 해뜨기 직전에 그런 듯 아직 축축해 보인다. 멧돼지가 갑자기 옆에서 튀어 나온다면 어찌해야 되나 생각해 보니 그냥 받치는 것 외엔 답이 없어 보인다.
예전 이맘땐 행궁지 안 단풍이 멋졌었는데 오늘은 그냥 누렇다. 단풍잎이 누렇다. 나라가 깜도 안 되는 놈  때문에 어수선하니 단풍도 걱정이 되어 그런가 보다. 
 
지난주에 보국문 북사면 길을 내려오며 서리가 내린 것을 보았어서 이 산에서 가장 추운 곳인 여기서 오늘 또 보나 했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행궁지 뒤를 크게 돌아 오르는 길의 단풍은 다 기가 죽어 있었다. 붉은 잎은 하나 없고 다 주황이거나 누렇거나 인데 그것마져도 잎 끝은 다 말라 비틀어진 짙은 갈색이다. 나무들도 나라와 국민들 걱정에 제대로 세월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밝고 맑은 판단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못 먹고 못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세뇌 당한 우리 세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지만 젊은이들은 판단을 할 줄 알아 좋다. 그런데 몇몇 언론들이 사실을 호도하며 여론을 왜곡하고 있어 걱정인데 대책은 없다. 대단한 무능정권이다. 그런데 왜 오늘 내 말이 이런데로 가냐고? 걱정이 돼서! 
 
산길을 오르며 쉽고 짧게 가자는 속삭임에 흔들린다. 그런데 꿋꿋하게 제 길을 제대로 다 걸었다. 늘 걷던 길을 따라서 말이다. 안 보이면 썬그라스를 쓰고, 안경에 김이 서리면 닦아가며. 아, 이참에 아마존에서 엄청나게 싼 김서림 방지 썬그라스를 하나 사야겠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내 발밑도 살피고 하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오늘은 둘을 한꺼번에 했다. 왜? 아는 목소리가 지나가는 것 같고, 게다가 모습들까지 비슷해서.... 
 
대피소에 도착해 배낭을 벗었다. 9키로를 걷고 처음 앉는 것이다. 편하고 흐뭇하다. 대피소 마당을 보니 완전히 밭을 갈았다. 산에 멧돼지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아내가 새벽에 만들어 준 보온병의 녹차 부터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진한 녹차향이 입과 코를 감싸고 흘러 내린다. 그래, 이런게 즐거움이다. 햄버거를 꺼내니 벌들이 수도 없이 덤벼 든다. 이놈들이 고기 패티에 앉는다. 콜라병 뚜껑 사이에 대가리를 디민 놈도 있다. 이 무슨.... 옆 자리에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던 산객도 화가 났다. 근처에 벌통이 있냐고 한다. 이렇게 많우 벌이 덤비는 것은 처음이다. 그 많은 벌들 속에서 쏘이지 않고 먹고 마신 후 배낭을 다시 꾸려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대피소 아래 단풍나무가 지난주와 같이 빨갛다. 등산객들 삼십 명 정도가 그 나무 아래에서 증명사진을 찍느라 줄을 섰다. 블라디보스톡 생각이 났다. 거기에서도 나와 같은 말을 하는 젊은이들 줄이 있었다.  

 

다시 배낭을 꾸려 가고 싶다. 아니면 차를 끌고 어디 외진 곳으로 라도...

 

08:51 계곡입구 출발이다.

중성문 아래 계곡 나뭇잎이 떨어져 가뜩이나 추운데 더 황량하다.

산영루 앞의 비석군. 모두 다 선정비인데 여기다 세운 이유는 임금이 행궁지에 오다가 보란 것이었겠다. 자기들 돈으로 이 비석을 세우진 않았을 것이고.... 백성들의 돈과 땀으로?

대피소 갈림길 앞의 억새가 볕을 받아 부드럽다.

주능선 너머 수락과 불암산이 보이고 그 아래 동네들도....

드디어 남장대지능선 끝자락에 올랐다. 이 길은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어 노마스크다.

의상능선. 작년엔 산 아래가 붉었던 기억이 있는데 누렇기만 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고 지금 살고 있는 동네. 신원리, 삼송리, 덕이동 모두 한 눈에 들어 온다.

상원봉 앞에서 삼각산을 배경으로

문수봉으로 가는 길에 단풍이 보였는데 일찍 피어서 지금은 잎이 다 말라 있었다.

문수봉에서 보으는 삼각산 

보국문으로 가는 길에서 보이는 주능선과 보현봉

전망대에서 보는 삼각산. 지난주에 삼각산을 가렸던 잎사귀들이 오늘은 많이 떨어졌다.

앞에 보이는 남장대지능선과 주능선을 따라 걸어 왔다.

남쪽전망대에서 보이는 형제봉, 백악과 저 멀리 관악산의 안테나도 보인다

북쪽전망대

보국문으로 내려가는 길

칼바위 앞으로 형제봉이 보인다.

동장대

대피소 앞 마당을 멧돼지가 다 파 헤쳐 놓았다.

대피소에서 내려가는 길

역사관 앞

다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