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동지였으니 아침이 깜깜하다. 오늘부터 낮이 점점 길어지니 움직이는 시간도 길어질 터이다. 왠지 이불속을 벗어나기 싫다. 어제 나온이가 일어나지 않겠다고 버틴 이유가 이런 것이었나? 손주들을 생각할 때마다 미소가 지어진다.
겨우 일어나 씻고 먹고 배낭을 꾸려 나오니 늘 같은 시간인데 밖이 어둡다. 셀프카메라를 대고 찍는데 10초도 더 걸리는 듯하다. 탄현역에서 열차를 타고 구파발역에서 내려 주말버스로 북한산성입구에 내리니 8시 반도 안 됐다. 버스 안에서 단체카톡에 정 박사가 5년 전의 내 사진을 올린 것을 보니 오늘 복장과 모자만 빼고 자켓, 티, 바지, 장갑, 등산화 모두가 같다. 단벌족 임을 모두 알 것 같다.
계곡을 향해 가는데 길에 인적이 없다. 기온을 보니 영하 15도라 표시되었다. 기온을 알아서 그런지 발끝이 시려온다. 집에서 부터 주머니에 넣은 핫팩이 따스한 온기를 뿜어 어깨가 펴진다. 웃옷 한 가지는 늘 벗었던 입구를 그냥 지나쳐 걸었다. 계곡이 얼어 물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숨구멍으로 내뿜는 물소리에 귀가 시리다. 겨울 등산의 즐거움 중 하나가 이 소리를 듣는 것이다. 가장 따스하게 발을 감싼다고 믿는 몽골제 낙타양말도 발가락을 시리게 하고 있다. 요 며칠 계속된 강추위가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바람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다른 때면 계곡에서 여러 명을 만났는데 오늘은 한 명만 지나갔다. 왠지 외로워진다.
역사관 앞 여러 개의 데크의자 중 두 개만 눈얼음이 없다. 배낭에서 이어폰을 꺼내 끼고 켑 자켓을 벗어 넣었다. 오늘은 길이 계곡입구 부터 눈과 얼음으로 덮였으니 쉬는 김에 미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이젠과 스틱은 아직 신지 않았다. 선암사 앞 급경사길이 얼어 흙을 덮은 것이 눈에 거슬렸다. 차를 밑에 두고 걸어 다니면 될텐데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굳이 차로 가려는 심리가 좀 그렇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 문수봉을 봐야겠다는 마음 먹었다. 걷다보니 발의 추위는 어느새 사라졌고 기온도 많이 올랐다. 커버트자켓을 벗는 것이 귀찮아 그냥 걸었다.
무심하게 걷는 것도 산에서 만나는 행복 중 하나다. 그렇게 걷다가 행궁지 갈림길 아래의 계곡 옆 바위에 닿았는데 이게 얼어붙어 있다. 나를 지나쳐 간 이가 스틱에 의지해 바위를 남는 것을 봤는데 직접 보니 비탈진 얼음덩이였다. 이곳은 그냥 가면 계곡물에 바로 빠진다. 배낭을 벗고 아이젠을 신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가로 내려서서 돌들을 짚으며 돌아 올랐다. 아이젠을 신으니 미끄러지며 걷던 걸음이 편해졌다. 이젠 발아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힘은 더 많이 든다.
대성암을 지나 힘들게 대성문에 올랐다. 소리가 들려 문을 나가니 댓 명 정도의 등산객들이 문앞 공사자재들 옆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이른 시간인데 반주도 곁들이는 모습이다. 이제 성곽을 따라가거나 엎어졌던 둘레길로 가야하는데 다시 자빠지지 않으려면 스틱이 필요하다. 스틱을 펴 짚고 문으로 올라 성곽을 따라 대남문으로 향했다. 대남문으로 내려가는 바위계단길이 얼어 있어서 스틱을 미리 내려짚고 한 발을 내리고 하며 겨우 대남문에 닿았고 바로 문수봉으로 올랐다.
일 년에 한 번 볼까하는 정도로 하늘이 맑았다. 옆 등산객이 저것이 바다냐고 서로에게 묻고 있다. 늘 보던 풍경 보다 맑아졌지만 눈이 시원찮으니 곧 심드렁해졌다. 문수봉에서 오래 쉬려다 집에 있는 먹거리 생각에 바로 남장대지로 향했다. 그리고 양지바른 바위에 배낭을 벗고 앉아 뜨거운 녹차로 속을 달래고 샌드위치를 먹다 조금 남겨 새들 모이로 던져두고 행궁지를 크게 도는 길로 내려왔다. 눈길엔 아이젠이 확실히 효과가 좋다. 얼음길에서는 쎄게 딛어야 하지만 눈길엔 평소 보다 약하게 딛어도 된다. 단지 바위를 만나면 날이 닳아 무뎌질까봐 조심해야한다. 바위에서 아이젠은 닿는 면적이 작아 미끄러지기 쉽다.
눈 덮인 행궁지를 지나 오를 때 만났던 계곡의 얼은 바위를 스틱에 의지해 정면으로 넘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서 스틱이나 아이젠이 필요한 곳까지는 이제 두 곳 남았다. 스틱은 흙이 붙어있어서 중흥사 앞 계곡물에 씻은 후 바로 접었고 아이젠은 법융사 위 계단 앞에서 벗었다.
겨울은 사계절 중 가장 힘이 많이 든다. 눈과 얼음 때문이다. 바람까지 불면 더 힘들다. 오늘은 11키로 정도 걸었는데 온몸이 매맞은 듯했다. 산아래 마을로 내려왔지만 한 잔 마시며 쉬고 싶은 곳이 없다. 바로 집으로 향하다 오늘이 일산 장날이라 들렸다. 구경도 하고 막걸리도 한 잔하려고 했는데 마음 닿는 곳이 없다. 힘들게 또 걸었다.
집에 와서 씻고 막걸리를 마시는데 아내가 일찍 퇴근해 돌아왔다. 피곤해 막걸리잔을 앞에 놓고 졸다가 걸려 안방으로 쫓겨났다.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머리가 아프다. 한 달이 거의 된 막걸리를 마셔서 그랬나?
어두워서 이 사진이 찍히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집을 나섰다.
수문자리에서 보는 원효봉
계곡에 얼음이 얼었다. 얼음을 뚫고 들리는 물소리가 참 좋다.
겨울답게 계곡이 얼었다.
폴포도 얼었다. 물의 양은 지난주보다 많이 줄었다.
역사관 앞이 텅~~~ 비었다. 여기가 이런 적은 거의 없었다.
중성문 아래 부러진 소나무가 외롭고 을씨년스럽다.
눈에 묻힌 산영루가 고요하다.
산영루 앞의 이 비석들은 거의 다 공덕비인데 벼슬아치들이 임금이 지나다 보라고 여기에 세웠을 터, 백성들의 고생이 눈에 훤하다.
산영루 앞의 와폭이 다 얼었다.
대성암. 따스하고 고요하다.
대성문. 성문 천정에 햇볓이 비추고 있다.
대성문
대남문으로 가는 성곽길에서 문수봉이 보인다.
대남문 지붕과 문수봉. 여기서 내려가는 바위에 눈과 얼음이 덮였으니 조심조심....
오늘의 목적지 문수봉에 왔다. 삼각산을 배경으로.
날이 맑아 구기동계곡이 잘 보인다.
오랜만에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등산객들도 맑은 날의 풍경을 즐겼다.
청수동암문 앞으로 구파발이 보였다.
상원봉의 표지판
상원봉에서 보는 삼각산
의상능선 너머로 집 옆의 제니스빌딩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 맑은 날은 년중 하루가 겨우 될까? 옛날엔 늘 이랬는데 이웃을 잘못 둔 죄다.
남장대지능선의 바람골. 눈이 바람에 날려 발목을 넘게 쌓였다.
남장대지능선의 끝자락
행궁지로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주능선. 동장대와 그 너머 수락과 불암산 그리고 멀리 양평의 산들까지 보였다.
눈에 덮인 행궁지
역사관 앞. 이 시간에 이리 텅 빈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다 내려왔다. 이제 바로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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